- 가봄
- 얼렁뚱땅 생태도감!
- 도리 _떙떙은 대학
- 201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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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98년도인가. 구령대에 교장 선생님이 올라서서 ‘IMF’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때 내 나이, 열 셋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나라가 많이 힘들다고 했고, 부모님은 더 힘들다고 했다. ‘IMF’는 “I’m F학점”이라는 뜻이니 재시험을 보면 된다는 희망찬 얘기도 빼놓지 않으셨다. 그때부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죽어라 공부했다. 힘든 나라보단 힘든 엄마 때문이었다.
내 기억에 98년 이전까지는 그래도 동네에 대한 추억이 있었다. 내가 살던 ‘새마을아파트’는 아파트란 이름이 무색하게도 3층짜리 건물이었지만, 그 일대에서 가장 높았다. 그래도 논이 천지라서 개구리를 잡고 놀았고, 거머리가 친구 다리를 빠는 광경을 보고 집에 오는 내내 엉엉 울기도 했다. 가을 논에서의 불구경은 동무들과 겨울을 맞이하는 의례였다.
수평의 거리, 하성면 아이들을 만나다
수업이 열리는 곳은 김포였다. 함민복 시인의 말대로 김포평야에는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었다. 나라가 힘들수록 아파트는 잘 올랐다. 수직의 거리를 지나 겨우 만난 수평의 거리. ‘얼렁뚱땅 생태도감’ 수업이 열리는 김포시 하성면 마곡리였다. 아이들은 동네를 김밥이 맛있는 ‘배꼽시계 분식’과 떡볶이가 맛있는 ‘간판 없는 분식점’으로 기억했다. 작년 동네 지도 만들 때 그렸던 ‘무지개 분식점’은 라면이 참 맛있었는데, 사라졌단다.
얼렁뚱땅 식물도감 만들기1. 감각열기
<사진 1. "얼렁뚱땅 생태도감" 수업 장면>
수업 시작과 동시에 아이들은 길에서 주운 클로버나 해바라기가 담긴 이름표를 나눠가졌다. 아이들이 ‘슈퍼돼지’ 또는 ‘양배추’로 부른다는 양재혁 선생님이 동그란 식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선생님이 이게 왜 모은다고 그랬죠?” ‘진공압축과 책갈피, 몰라요’ 사이에서 용케도 ‘식물도감’을 기억한 아이가 있었다. 저번 시간 동네에서 채집한 식물의 도감을 만드는 시간이라고 선생님이 말했다. 아이들은 서로가 주워온 식물들을 만져보고 느낌을 말했다.
“딱딱하고, 더러워요”
“까칠까칠해요”
“더러운 느낌에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토끼똥, 말똥 같아요”
얼렁뚱땅 식물도감 만들기2. 관찰해서 표현하기
이내 하얀 종이 위에 각각의 식물이 놓이자 한 아이가 더 선명해 보인다며 눈을 반짝였다. 가운데 놓인 식물들을 최대한 자세히 그리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색색이 사인펜을 이용해 아이들은 종이 위에 놓인 벼와 빨갛고 작은 열매, 하얀 솜털이 달린 풀, 나뭇잎, 시든 풀, 동그란 열매, 클로버를 그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린 식물에 별명을 붙여주었다.
<사진 2> <사진 3>
<사진 4> <사진 5>
“태산가족공원에서 내가 ‘드르륵’ 떼어왔어요” 자랑하던 아이는 ‘벼’에 ‘팔딱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바람이 불면 가만히 있지 않고, 팔딱팔딱 날아가서란다. (사진2)
한 아이는 잎사귀 위에 작은 열매와 솜이 올려놓았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별명을 ‘음식’으로 지어주었다. 잎사귀가 쟁반 같고, 열매와 솜이 음식 같다고 했다.(사진3)
자신이 만지는 모습과 그 느낌을 그린 아이도 있었다. 그 식물이 얼마나 거칠거칠한지, 몸으로 느낀 감각 자체를 전하는 듯 했다. (사진4)
‘더럽다’라는 별명을 지은 아이들이 세 명 있었다. 모두 시들었거나 사용할 수 없어서 더럽다고 했다. 아이들은 초록색으로 풀을 그리고, 검정색으로 덧칠을 했다. (사진5)
하루가 다르게 새 아파트가 올라가고, TV에서 매일 젊고 생생한 배우들의 세련된 도시 생활을 목격하는 아이들에게,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의 가치를 말해주는 어른은 없었을 것이다. 예전 농촌에서는 죽어가는 것이 거름이 되어 다시 생명으로 돋아난다는 걸 자연스럽게 배웠다. 하지만 아파트논이 생기고, 층층이 나누는 문화가 어느 마을에나 순식간에 들어오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 이 도시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새것과 헌것, 잘난 것과 못난 것’을 나누는 수직의 세계이다. 그 세계 안에서 아이들이 바라보는 오래된 자기 동네의 모습은 어떨까. 내가 치루던 재시험을 아직도 이 아이들이 아직 치루고 있구나 싶어 뜨끔했다.
네 번째 사진 오른쪽 위에는 ‘부드럼’이라는 글씨가 새겨져있다. 그 단어를 부여잡고 싶은 건 뜨끔한 어른의 미련인가 싶어 의미를 부여하려다 만다. 아이들은 보고 느낀 대로 말하고 표현했다. 어른들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으니, 더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더럽다’와 ‘부드럼’이 다 아이들이 몸으로 만나는 세계였다.
얼렁뚱땅 식물도감 만들기3. 간직하기
식물도감을 다 그린 뒤 아이들은 비닐에 식물을 담아 밀봉 포장을 했다. 채집한 식물의 모양이 망가지는 것을 막고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식물이 담긴 비닐 위에 아이들은 정성스럽게 자기 이름을 썼다. 식물과 닮은 동물 그림을 그려두기도 했다. 힘든 나라, 힘든 부모만큼이나 어제 맛있게 먹었던 분식집이 사라지고, 새로 생긴 분식집에 입맛을 맞춰야 하는 거리에서, 이 아이들도 적응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며 살 것이다. 아이들이 발견한 식물들도 오염된 거리에서 무진 애를 쓰며 피웠을 꽃이고 나뭇잎이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을 들춰내고, 발견하고, 솔직하게 표현한 아이들은 어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들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하나의 탑이 되어 가는 세상 속에서, 아이들이 그나마 수평을 잡으며 일상을 일구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