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봄
- 지지봄봄 포럼 3부 종합토론과 공유 _ 묻고 답하기(2)
- 강원재 _강원재
- 2015.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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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재(사회자) : 우선 고영직 선생님이 대답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발제문을 다 발표 안 하셨는데 경기도 혁신학교 이야기도 들어 있어요. 학교 안에서의 문화예술교육. 혁신 학교는 공교육 안에서 방금 질문했던 것들을 넘어서는 시스템을 만들어낸 거거든요. 그 핵심적인 원리가 무엇이었는지 이어서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질문과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해 주셨는데 한 분씩 돌아가면서 이야기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양재혁 : 저에게 왜 질문을 주시는지 고달파지네요. 저는 좀 아울러서 대답을 드릴게요. 공교육에서의 교육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요. 제가 아르떼에서 예술 강사에게 강의를 해 봤는데요. 학교로 들어가시는 예술강사들에게 가장 놀란 게 분 단위, 초 단위, 매뉴얼이 있어요. 2분간 인사, 3분간 안부, 준비운동 5분. 저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교육이 이렇게 이뤄질 수 있나? 공교육, 특히 학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매뉴얼인 것 같아요. 저도 학교에서 있어봤지만요. 계획되어 있어야 하고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실제로 우리가 현장에서 수업하다 보면 페이퍼는 거의 정확하게 사용되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페이퍼에 약속한 내용대로 안 한다는 것을 공교육은 굉장히 불편해 해요. 이런 교육이 공교육 안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매뉴얼을 버리는 작업이 먼저 이뤄져야 할 것 같아요. 먼저 우리 태도도 먼저 바뀌고 합의를 도출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건 매뉴얼이 버리는 작업이 우선시 되어야 할 것 같고요.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현장에 있는 사람이지만 사례발표 하는 걸 싫어해요. 특히나 이런 곳에서 사례발표를 하는 건 우리에게 감동을 주라는 이야기거든요. 그게 정말 감동을 진하게 드리면 그건 매뉴얼이 돼요. 학교에 들어가서 그대로 따라가는 매뉴얼이 돼요. 그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제가 게임을 워낙에 좋아해서. 모두의 마블이라는 게임 아시나요? 핸드폰으로 하는 게임인데,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모두 다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마트에서 모두의 마블을 사왔어요. 근데 못하는 거예요. 컴퓨터랑 핸드폰이 없으니까 전혀 못하더라고요. 그러다 약 한 시간이 지나니까 은행을 담당하고 있는 친구가 자기와 친한 친구한테 뒷돈을 찔러주고. 자기만의 룰들이 나타나는 거죠. 매뉴얼을 버리면서 즉흥성이 나타나더라고요. 공교육에서는 그걸 버리는 게 가장 빠를 것 같고요.
아까 강원재 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현장 이야기를 해 드리자면, 저는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또래 언어나 또래 문화에요. 제가 생각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이 바라보는 시각과 아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거죠. 저는 김포에서 마을사용설명서라는 마을 책을 하나 만들고 있어요. 이 아이들이 마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작업인 거죠. 또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굉장히 재미있는 것들이 나와요. 우리는 쉽게 지나치기 쉬운 것들. 그 중에 재미있는 것을 예로 들자면 세븐일레븐을 이용하려면 오후 4시 이후에 가야 한대요. 왜 그러냐 했더니 오후 4시 이후에 남자 알바가 잘 생겼다는 거죠. 아이들 시각으로 보는 지점들이 우리가 놓치는 부분이라는 거죠. 그런 것을 편리함에 뺏기지 말자는 거죠. 부딪치고 관계 맺게 해 주고 이런 것으로 인해서 아이들 시각을 확장시키고 바운더리를 넓혀주자. 저는 그런 생각으로 문화예술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대답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영직 : 저에게 두 가지 질문이 왔는데요. 당뇨 말고요. 고혈압입니다. 고혈압 지수 3%를 낮췄을 때 파급력이 25% 나온다는 것은 역학조사를 해서 예방의학자니까요, 나온 거고요. 제프리 로즈라는 사람이. 그 이야기가 저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이었어요. 고위험군은 전문가에게 처방을 받잖아요. 전문가에 의존하는 방식, 요즘 보면 자동차에 의존하고 학교에 의존하는 시스템이 내 안에 갖고 있는 고유한 사용가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이 훼손되고 파괴되는 거예요. 전에는 뭘 만들어서 스스로 제작 하거나 놀이를 하거나 그런 것들이 가능했는데 그런 기능이 망가진 거예요.
19세기 미국의 셰익스피어라고 할 수 있는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을 보면 즐겁게 놀잖아요. 또래 애들 꼬여서 페인트칠을 재미있게 하잖아요. 지겨운 노동을 놀이로 만들고 재미있게 놀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건드리는 건데요. 그게 자꾸 파괴되는 거죠. 근대 교육이 그런 거였던 거고 공부를 많이 하거나 많이 하면 할수록 오히려 똑똑한 나쁜 놈을 양산하는 교육체제가 됐고 그런 체제에서 살고 있는 거잖아요.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오만가지의 문제가 지리산에서 농사짓는 사람이 사고 칩니까? 배우는 사람들이 사고 치는 거잖아요. 뭘 배우는 겁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뿌리에 근거하지 않는 쓸모없는 지식을 배운다는 거죠. 그래서 내 안의 사용가치를 전부 잃어버리고 사소한 감기만 걸려도 처방전을 받고 약을 타서 먹고 주사를 맞는 이런 체계가 되니까 내 안의 고유한 면역체계, 나쁜 기운에 맞서는 것이 사용되지 못하고 수동적인 개체로 변하죠.
이런 것들이 교육 뿐 아니라 복지 시스템에도 작동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취해할 태도는 전문가주의 대해서 존경을 거두고 의심을 가지는 태도를 취해야 된다고 봐요. 이반 일리치라는 철학자가 강조한 바이기도 하고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서 역설하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잠재된 능력, 사용가치에 회복이 필요하다는 측면을 공교육 현장이나 문화예술교육 현장 안과 밖에서 어떻게 이것을 구현할 수 있을지 일단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교육에 대한 척도 자체가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교육이라고 써놓고 축사라고 읽잖아요. 가축을 길러 내는 거지 우리가 인간을 길러 내는 교육을 하고 있지 않잖아요. 그런 점을 통렬하게 반성하고 회심을 하고 눈을 뜨고 모두가 개안을 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고요.
또 하나는 교육 문제에 대한 것 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느낀 게 생태, 생명, 생활의 가치가 어우러져서 교육이 이뤄진다기보다 저마다 분절된 방식으로 이뤄지죠. 이를테면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생태 교육이 이뤄진다는 거예요.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어 있고, 일터, 삶터, 놀이터가 분리되어 있는 세상에서 이어주고 연결하는 기능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걸 하는 게 중요한데 그걸 알게 하는 교육이 중요합니다. 제가 많이 들여다 본 건 아닙니다만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그걸 연계의 지점을 얼마만큼이나 만들고 있는가. 그렇다면 참여하는 선생님 자체도 달라져야 하지 않나. 시스템이나 구조적인 문제를 간과해서 드리는 말씀은 아니고요.
우리가 가진 능력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는 걸 생각해 보고, 저마다의 현장에서 구현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그래서 마을과 학교가 슬러시 되는 담장이 아니라 하이픈으로 연결될 수 있는 다리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이 되고요. 그런 다리가 있다면 적어도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다리가 있다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거죠. 인간이란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애니멀적인 능력이 있잖아요.
양재혁 선생님도 인상적인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저는 사례발표나 리서치를 싫어해요. 사전에서 도려내고 싶어요. 자꾸 사례발표랍시고 들여다보면서 자기가 하는 교육이나 사업에서 그걸 업데이트 해 가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소비할 따름이에요. 교육현장에서 너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잖아요. 자기의 고유한 사례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한데 그걸 하지 못하고 저마다의 사례를 소비하고 트렌드를 쫓아서 하고 있는 관성적인 아비투스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해 저항하고 새로운 걸 모색해 나가고 좌충우돌하더라도 내 나름의 길을 모색해 나가는 과정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발제를 쓰기 위해서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다시 봤는데요. 제가 다시 보니 예전에 친 밑줄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더라고요. 전혀 다른 밑줄을 치게 됐어요. 그 중에 나다크 속담인데 ‘호랑이의 줄무늬는 몸 밖에 있지만, 사람 줄무늬는 몸 안에 있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저는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지만 제 줄무늬는 안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말로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박희선 : 궁금해 하시는 식초 막걸리는 우왕좌왕 한 사례로, 식초에 대해서는 전문 강사와 먼저 하고 그 다음 프로그램을 제가 하려고 했어요. 사실은 지원사업의 지원과 심의와 선정과정에서도 일종의 시스템이 작동을 하죠. 32차시든 64차시든, 정해서 그 안을 메워서 내야하고요. 저는 일단 채우기는 했지만 그렇게 진행될 거라고 생각 안 했고,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어요.
대략의 흐름으로 아마도 식초를 6월에 담갔으니, 가을에 같이 주민들과 식초카페가 될 것이라고만 러프하게 짜고 오히려 현장을 잘 관찰하면서 현장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막걸리를 소재로 바꾸고 주민들의 주도적인 참여를 끌어냈던 것이 진행에 있어서 유연한 방법이 됐던 것 같아요.
아까 제가 시스템에 대해서 애비(App-E)니 뭐니 저는 어려워서 잘 이해는 잘 안되고요. 제가 생각하는 것의 교육과정이나 커리큘럼이라는 것도 오히려 현장에서 계속 같이, 저도 참여자니까요. 기획자라서 모든 걸 만들고 시스템을 만들어나가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나도 참여자고, 참가자는 다 주인이라는 의식으로 같이 하기 때문에 저 같은 경우는 오히려 기획서는 '가라'로 쓰고 결과 보고서는 꼼꼼하게 쓰니까 명쾌하게 떨어지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시스템에서 자유로워야 문화예술교육이 힘을 받지 않을까 합니다. 긴 호흡을 갖고 하다 보면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답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간단히 하겠습니다.
김경옥 : 다들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말씀을 드리면 아까 누리과정에 대해서 말씀하신 분에게 전문가는 아니지만 제 소견을 말씀드리면요. 다른 초등이나 중등과정이 좀 달라야 한다면 인간의 발달과정에 대한 공부나 성찰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럴 때 누리과정 아이들의 경우는 아직 지각능력이 만들어져 있지 않고 그 시기에 집중해서 힘을 키워야 하는 것 같아요. 스스로든 주위에서는 도와줘야 되는 것은 오늘 많이 나왔던 감성, 감수성, 생명력이겠지요.
그것이 피어오르는 때니까 뇌든 몸이든 한창 그런 감성이나 감각을 만들어나가는 만드는 과정이니까 그런 것들을 자극 시켜서 그 자극이 나의 뇌나 글로 전달이 되면서 활성화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지원이 필요할 것 같아요, 누리과정에서는.
특히 그 과정에서는 텍스트 중심 교육이란 전혀 말이 안 되고 아이들의 육감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적 자극. 이때 자극적인 건 세상에서의 자극적은 것과 다를 텐데 기본적인 감수성과 감성을 일깨울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이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은 듭니다.
요즘 조기 교육이나 해서 뱃속에 있을 때부터 영어공부 한다고 하는데 그게 아이의 뇌를 혼란하게 하고 감성이 키우는 데 방해가 된다고 해서 이중 언어 교육을 받은 아이가 7세 이상이 되면 조울증이 위험이 더 있다는 이야기도 있거든요. 그 시기에는 따뜻하고 일상적인 리듬으로 규칙적으로 지내면서 하지만 자연물이나 인공물에 감성을 키우는 자극을 주는 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이게 일종의 지침이 되는 거겠죠. 전문적으로 다른 지침이야 있겠지만 제 식으로 이야기하면요.
그 지침이 되는 걸 가지고 내가 만나는 아이들과 무엇을 할까는 내가 고민해야하죠. 그런데 그 지침이 너무 구체적이 되면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 대한 성찰이 없어지니까 실제로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의문이죠.
그게 오늘 나왔던 매뉴얼과 시스템과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사실 근대교육이든 의무교육이든 국가의 교육적 책무감이 나오는 건 근대에 들어서고 귀족만 받는 게 아니라 일정한 연령이 되면 교육을 받는다고 사회가 변한 것은 긍정적이었던 거죠. 그 안에서 무엇을 했는가는 차치하고, 교육이라는 근대 시스템으로서 학교가 운영이 된 것은 대단히 인류가 진일보했던 거죠.
진일보할 때 학교만 만들어진 게 아니고 학교라는 시스템이 특히 19새기 20세기 일관된 방향은 표준화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체계화 그리고 보편화. 대중이 뭘 고민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사람들은 뭘 필요로 하는가.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어떤 게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주거공간으로서의 안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까, 이걸 고민한 게 19-20세기였고 그러다 보니 아파트라는 기괴한 공간이 생기기도 했고요.
아까 홍콩 이야기도 나왔는데 홍콩은 그런 공간이 없으면 누울 자리를 못 가지게 되잖아요. 그런 것이 인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은 그것을 괴물이라고 하지만 인간은 어쨌든 더 나은 걸 생각해 내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부정할 수 없으니까. 그 점에서 학교라는 교육 시스템, 현재 빚어지는 교육 시스템이 이뤄지기까지는 또 그 인간들이 열심히 생각하고 만들어 왔을 것 같아요.
동일한 인간은 아니겠지만 학교에서 교육 받은 인간들은 ‘이건 아닌 것 같아’ 21세기에는 보편화 체계화 대중화가 아닌, 그에 맞지 않는 인간이 있을 수도 있어. 또는 그것에 균열이 일어나고, 다른 형태로 만들어가는 게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학교라는 시스템에 균열을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아까 질문하신 분이 시스템이 없을 때 불만이었다가 시스템이 만들어지니까 또 불만이 생겼다고 한 것도 그 이야기고요. 그 즈음에 있는 게 우리가 아닌가 생각하거든요.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한 거예요. 그 새로운 시스템이, 새로운 체계, 새로운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할 때,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우리가 어떤 기준을 만들고 체계화 시키고 할 때, 체계화의 이유, 이 매뉴얼, 이 기준이 나온 이유를 아는 사람들끼리는 균열이 일어나지 않죠.
질문하신 분도 구로에서 작은 조직을 만들었을 때도, 조직의 시스템을 만들어나갈 때 시스템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서로 토론도 하고 공감도 하고 어떤 걸 만들었을 것 같아요. 당시에는 그 분들에게는 적당한 시스템이었을 텐데 아마 그 이후의 사람에게는 그 시스템이었는지 그런 매뉴얼이 필요했는지에 대한 전제를 모르는 거죠. 동의가 안 되고 공감이 안 되는 거예요. 이유를 모르니까요. 불필요한 점도 생각이 나는 거죠. 그러니까 ‘이건 아니지 않나’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거고요. 저는 그 또한 시스템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걸 시스템으로 받아들이면 갈등의 소지는 줄어들 것 같아요.
궁극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건 일을 잘하게 하는 골격이 필요한 거지 그 시스템 자체는 아닌 거니까. 우리에게 전설로 내려온 이유는 어떤 숙제를 미션을 달성해 내기 위해 이런 골격을 만들었는데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미션이 다르면 다른 골격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그 합의 과정이 원만하다면 크게 갈등은 없는데 그걸 어떻게 소통해 낼 건가가 중요한 것 같고 교육의 장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교육의 장에서도 매뉴얼이 필요한 것도 있어요. 세월호 때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게 매뉴얼대로 안 움직였다. 선장은 1등 항해사는 이랬다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매뉴얼이 꼭 필요한 곳도 있어요. 서로 이해하는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두고 실행하면 되겠죠.
그런데 매뉴얼이 필요하지 않은 곳도 있는 거죠. 두 가지가 다른데 매뉴얼이 필요하지 않은 곳에 요구하고 필요한 곳에서는 매뉴얼이 없는 이 부조리함이 생겨나고 갈등도 생기고 실패도 하고 심지어는 생명을 잃기도 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 같아서…….
교육에 있어서도 지금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매뉴얼, 체계가 무엇인가 그 속에서 뭘 가르치려 들고 또 우리는 뭘 배우려고 하는가에 대해 이즈음에 다시 생각해 봐야 하고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숙제는 다른 거니까 활발하게 이야기되고 있는 거고, 일정한 방향성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대한민국에서도 10년 정도 그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는데요. 탈학교 등의 담론이 나오고는 있지만 그걸 전면적 시스템으로 만들기에는 우리 사회가 그 전설,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에 대한 공유는 전체에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요. 각자가 바라는 게 다른 거죠. 교육이 이뤄내야 한다는 요구와 욕망이 다 다른 것 같아요. 그걸 같이 만들어 가는 과정이 필요할 거고요.
같이 만들어가는 그 과정, 시스템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모든 욕망이나 요구가 똑같아지는 건 아니라서 임계시점이 넘어가면, 예를 들면 국민의 60% 이상이 교육에 대한 욕망이 만들어진다면 그때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40%는 동의하지 않아도 60%의 힘이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30%만 우리끼리만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다면 정책화하기에는 이른 시기겠죠. 교육도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이 들고요. 하지만 교육은 비즈니스와 다른 게 어쨌든 교육이 행해지는 학교라는 시스템 안에 실제 아이들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포기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 시스템이 바뀌기 전이라도 균열을 내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전면적으로 뒤집어엎기 전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면서,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으니까요. 균열을 내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질문을 던질 거고 사실은 사례 발표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 사례를 내 것으로 온전히 가져오기란 불가능 한거죠. 내가 만나는 아이들이 다르고 내가 그 사람이 아니니까. 그 사례에서 가져와야 하는 건 그 문제의식이 뭔지 내가 어떻게 가져와야 할지. 내가 만나는 아이들과는 어떻게 공유해야할지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허망해지고 가능할지, 우리끼리 몇 명이 하다가 그만두는 게 아닐까 힘 빠질 때가 많은데 그럴 때 저는 인간을 믿어본다. 크로마뇽인 말씀도 하셨는데 인류가 그 긴 세월 동안 나아왔듯이 문화권도 인정받게 됐잖아요. 하나하나 쟁취하고 있는 것처럼 나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다른 사람보다 먼저 균열을 일으키겠다. 그런 느낌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이 균열이 번져 가면 몰랐는데 내 옆에도 그런 사람이 있던 거고 그것이 연결되면 임계점을 넘어 시스템으로 전환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낙관이 없으면 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원재 : 저도, 어떻게 떠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이야기 해 보면요. 일 년 정도 아이들 만났는데 아이들을 어떻게 떠날 것인가. 이런 고민하시는 선생님들은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겠죠. 학교 현장은 더더욱 그럴 것이고요. 질문자분이 전통시장도 하셨다니까 그렇고. 저는 뭐 그냥 잘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잘 떠나야죠. 그럼 잘 떠나는 게 뭔가.
서로 아쉬워하는 사이가 되어야 하는 거 같아요. 헤어짐에는 아쉬움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런 헤어짐에 의례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만들 것인가. 그건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요. 훅 떠나는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헤어지고 있다는 걸 서로가 인식하는 것. 그리고 이 헤어짐이 어떤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는 것인지 정확하게 서로가 인지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잘 헤어지지 않으면 그 다음 관계도 일도 못 하게 되거든요. 교사들도 마찬가지고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헤어졌는지 어떻게 된 건지 혼란만 쌓이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잘 헤어지는 법을 지금부터 잘 찾으시는 게 좋겠다는 것으로 가름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