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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지봄봄포럼_1부 기조강연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삽시다(2)
  • 김정헌 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 2015.02.09

 

 

2. 예술과 예술교육

 

예술은 이렇게 비유를 통해 만들어지는 또 하나의 세상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삶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세계인 것이다. 예술을 통해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든다는 의미에서는 종교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처럼 기독교에서도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비유하여 구원하려 하진 않는가. 성경에 얼마나 많은 ‘비유의 말씀’이 나타나는가

 

그래서 예술을 19세기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예술이 종교를 대체했다고 이야기하는 철학자들이 많아졌습니다. 예술이 종교를 대신한다, 예술이 종교와 역할이 비슷한 게 많습니다.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 예술이 근현대로 오면서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 아까 비유 이야기도 했지만, 예수님이야 말로 비유로써 세상을 가장 많이 드러냈습니다. 제일 비유를 많이 사용한 사람이 예수님일 거예요. 성경은 전부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봐서도 종교와 예술과 흡사한 데가 있죠.

 

예술은 이처럼 또 하나의 세상과 문화를 창조한다. 세상에서 나고 자라는 성장기의 어린이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또 하나의 세상을 갖게 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현실에 직면하는 단 하나의 세상은-동물처럼 의식주만을 반복하는 세상은 얼마나 삭막하고 괴로운가? 또 얼마나 큰 공포인가? 우리가 살면서 도피처이면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세상을 갖고 있지 않으면 생존을 지탱하기조차 쉽지 않을지 모른다. 어떤 대안의 세상을 갖지 못한 채 막다른 골목에 몰린 많은 학생을 생각하면 끔찍한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또 하나의 세상을 꿈꿀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권리를 인정하고 당당하게 행사하게 하는 교육이 바로 예술교육인 것이다. 즉 또 하나의 세상을 꿈꾸고 상상하게 하는 교육이 바로 예술교육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예술교육의 권리는 일종의 생존을 위한 기본권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학이나 국어나 영어는 그야말로 수능, 대학입시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지만 예술교육은 그것들과 관계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이야기가 나돌았어요. 예술교육이 정규 교과목에서 밀려나고 축소당하니까 예술 쪽 담당 선생님들로 해서 수능 과목으로 집어넣을 수 없을지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그러면 영점 몇 점 차이로 학교에서 난리가 나겠다 이거예요. 그렇게 되면 사실 너무 끔찍한 거죠. 미술이 수능 영역에 들어갈 수도 없는 거지만 선생님들이 답답하니까 (그랬겠죠) 들어갔으면 꼬락서니가 아주 형편없었을 것 같아요. 

 

예술 교과는 우리 현실에서 처한 환경이나 대학의 경쟁력을 제공하는 것과 관련 없이 하지만 그러므로 더 소중한 과목입니다. 그래서 예술교육이 조금 더 활성화되고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날이 갈수록 변두리 쪽으로 밀리고 있지요. 그런데 참 이게 따지고 보면 위기가 기회라고 예술교과와 교육의 중요성, 예술교육이 왜 중요한지 그 가능성을 여기 딸린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아래에도 이야기 했습니다마는 (예술교육은) 단순히 교과목으로서의 교육이 아니라 일종의 감성교육입니다. 예술교육이 세상을 구하는 전진기지여야 한다고 했는데요. 요즘은 서너 살 되자마자 교육 받게 하잖아요. 사실 그때서부터 감성들이 생겨나는 건데 원래 어린이들이 가지고 있던 감성들을 없어지게 하는 것이죠. 

 

아까 강원재 선생이 춤 이야기했는데요.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해 두 번째 단락에 써 놨어요. 조르바는 실존 인물인데요. 주인, 대장이 같이 대장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 사업을 하게 되는데요. 매일 붙어사는데 사람 형이 너무 다른 거예요. 하나는 학자타입, 아마 카잔차키스 본인일 것이라고 추측이 되는데요. 조르바가 대장이라고 부르는 그 사람은 매일 책을 끼고 다니지. 

 

그 사람한테 대화하다가 자꾸만 부딪치는 게 학자와 야성이 살아 있는 조르바가 부딪치는 거죠. “두목, 끼고 다니는 책 좀 불살라 버려” 둘이서 광산에 들어가서 사업을 하는 거거든. 광산에 무슨 책이 필요한가, 그래서 조르바가 책을 없애버리라고. 그런데 “왜 책을 없애라고 그래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랬더니 조르바가 나는 들풀, 굴러다니는 돌, 빗물과도 대화를 한다. 춤으로 대화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춘 게 조르바 춤이에요. 영화니까, 슬라브 쪽 춤이 나오는데요. 

 

나도 여기서 영감을 받아서 기회만 있으면 몇 년 동안 춤을 췄어요. 술자리에서 건배사 해달라고 해도 춤으로, 축사 해 달라고 해도 춤으로. 오늘 강의도 사실 춤으로 하면 참 좋은데요. (웃음) 조르바한테는 정말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감성이라는 거죠. 그런데 잘못하면 지식이나 지성에 의해서 감성이 전혀 활동 못하게 되는데 학교 교육이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거죠. 이것을 살려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아래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썼는데요. 

 

지금은 한 50년쯤 지났는데요. 69년도에 68학생혁명이 있었어요. 지금 내가 대학교 다닐 때쯤일 겁니다. 68학생혁명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70대가 되어서 늙었는데요. 당시 학생혁명은 전세계적인거야. 우드스탁에 모여서 며칠씩 밤 새워가면서 록페스티벌을 열고 거의 모여서 그냥 몸만 흔들고 소리 지르고만 한 게 아니고요. 월남전 반대 운동이 거기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예요. 우리는 미제국이 벌린 전쟁에 끌려가기 싫다, 그래서 히피가 되어서 병역거부하고 떠돌아다니고 인도로 도망가고 그랬죠. 

 

유럽 같은 곳에 서는요 이런 신화 같은 이야기가 많았어요. 성냥개비 하나로 다섯 명이 불을 붙였다. 그만큼 경제가 어렵고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 다음에 독일 라인 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시기 동안 어른들이 젊은 사람을 꼼짝 못 하게 했어요. 젊은 애들이 시시덕거리는 것을 경계했고, 프랑스에서도 길거리에서 껴안지도 손도 못 잡고 전후의 어른세대들이 젊은 사람의 감성을 장악하고 쥐어짠 거죠. 

 

중남미에서부터 혁명의 열기가 유럽을 휩쓴 거예요. 그때에 일본까지 영향을 끼쳐서 적군파, 과격파도 나온 것이지만요. 유럽은 68혁명을 ‘에로스 혁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감성혁명이라는 거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성을 표현하는데 어른들 기득권자가 나서지 마라,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 그것이 학생혁명의 중심 주제였던 거예요. 그래서 세상이 자유스러워 진 것입니다. 우리도 봉건 윤리의식 때문에 많이 규제를 당하잖아요. 습관적으로 관습적으로 이건 된다, 안 된다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통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의식이나 감성을 장악하고 있으면 그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그런 식으로 감성이 열리지 않은 채로 세상을 보면 답답하고 삭막한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감성을 열어주는 교육, 이것이 문화예술 교육의 중심이다.

 

그래서 여러분한테도 하여튼 기회만 있으면 춤을 추세요. 나는 춤을 주로 저쪽 가평에 내 화실이 있는데 가평에 재즈 페스티벌이 있어요. 거기 가면은 백발을 휘날리면서 계속 한 시간 동안 춤을 추고 나면 1년 보약을 먹은 것 같아요. 기분도 좋아지고 그 뭐, 음악만 있으면 나는 몸이 흔들리니까. 그래서 내가 좋아서 추는데 내가 추면 머리 하얀 백발이 추면 젊은 사람도 일어나서 추는 거예요. 

 

어떤 감성과 감성이 서로 부딪히면서 감성의 혼들이 자유스럽게 오가는 그런 분위기를 이 문화예술 교육에서 만들어야 합니다. 뭔가 규칙대로 정해진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즉시로 소통하면서 학생들의 상상력이 불러온 것들을 그걸 수용할 수 있는 선생님들은 같은 감성을 어느 정도 공유할 줄 알아야지만 가능한 거예요. 학생들이 이야기하는 게 엉뚱해 보인다고 배척하기 시작하면 격식에 맞춘 딱딱한 문화교육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시간 많이 지나갔지요? 아이고 그런데 10분 늦게 시작했거든요. 5분 이내 끝내겠습니다. 

 

그 아래에는 반복해서 예술교육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요. 그 뒤에 미술교육과 지역 문화예술단체의 사회적 역할은 충남 문화예술교육 지원 센터에서 문화예술교육에 관해서 이야기해달라고 해서 2년 전인가 강의했던 내용이에요. 

 

아까 내가 미술교육에서 사실은 그렇게 성공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는데, 미술교육에서 그 DBA 교육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음악에도 있고 다른 분야도 있는데요. 이것은 미술에서 실기만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혁신적인 교육 방안입니다. DBA. 미국에서 시작된 건데요. 미국 석유재벌 폴 게티라고 석유로 억만장자가 된 집안인데 폴 게티 재단을 세웠어요. 이곳은 우리나라 삼성재단과 같은 게 그림만 사 모으는 게 아니라 학자들을 모아서 방법을 연구시켰습니다. 

 

그 방법의 하나가 DBA이에요. 미술과 인문교육을 거기에 집어넣어서 가르치는 게 좋다. 다른 게 아니라 미술 쪽에 가까운 입문 미술사, 미학, 미술 비평입니다. 그것을 실기와 같이 가르쳐야 한다. 1960년대에 이 교육론이 나와 70~80년대 미국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뒤늦게 소개가 됐고요. 내가 보기에는 이게 정말 맞는 이야기에요. 뒤에 나오지만 비주얼 리터러시, 시각적 문예력 즉 시각적 읽기가 가능해야 한다는 거예요. 단순히 ‘사과가 있구나! 꽃이 있구나!’ 하는 게 아니라 세잔느의 사과는 어떤 의미가 있고,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사과는 어떤 것들인지 미술사의 맥락에서 작품을 이해하고 또는 미학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또 비평적인 안목으로 이해하는 거죠. 

 

그러니까 읽기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미술교육에서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해요. 표현교육, 그리는 방법을 이야기해주는 것보다는 미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통해서 미술의 세계를 알려주는 것이 표현교육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뒤에도 나오지만 리터러시 교육은 교육론 중에서도 고차원적인, 그래서 문맹률이 높은 남미에서 글자를 해독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된 이야기긴 하지만, 어쨌든 DBA 교육에서도 비주얼 리터러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여러분들이 기회가 있을 때 공부를 해보시고요. 이걸 하기 위해서는 미학, 미술사, 미술비평도 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텐데요. 이 교육과정이 체계적으로 잘 만들어져 있지 않지만, 이것에 대해서 선생님이 미학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떤 건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해요. 예술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고,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어떤 줄기를 가졌는지 공부해 가면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이런 것을 보는 현대적 비평적 시각은 어떤 게 있는지, 예술교육이라면 선생님들이 예술을 하고 관계있는 활동을 할 때에는 같이 연구주제로 삼아야 한다. 선생님들이 그래서 DBA 교육에 대해 참고를 하시고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고요.

 

그리고 미술교육의 사회적 역할, 공공성과 다양성 이 이야기는요. 미술과 음악교과가 국민 공통 기본교과목으로 살아남아 있긴 합니다. 그래서 방과 후 학교에서 부족한 예술교육을 보충하고 있긴 하지만 그 이게 국민 공통 기본 교과목이란 국민으로서는 숙지하고 알아야 할, 의무가 아니고 ‘권리'입니다. 권리라고 생각하고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소위 예술 교과의 공공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다양성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이야기는 여러 가지 차이에 대해서, 비유나 여러 가지 상징이나 기호로써 드러내야 한다고 했고요. 

 

내가 실패를 아주 잘하는 사람인데요. 미술교육에서도 실패했다기보다는, 변명으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요즘에 실패했다고 하는 것은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마을운동을 해보려 했습니다. 그래서 제천의 폐교를 빌려서 주민들과 더불어 예술을 매개해서 활동하다 보면 축 쳐져있는 시골의 주민들의 자립성이 활기를 되찾지 않을까 해서 4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그러면서 만든 것이 제일 뒤에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를 제안하며’ 라는 제안서를 만들어서 여러 사람에게 공표하고 문화예술로서 마을운동을 시작한다고 알리는 제안서를 첨부했는데요. 

 

참고로 이 활동이 5년 가까이 되어 오는데 지금 이 활동을 실패한 것으로 단정하고, 다 정리해산 중입니다. 상당히 다들 표정이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시는데요. 나는 이 활동이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가면 노인회에 가서 잘 놀았어요. 마을 영화제도 하고, 마을 잡지, 달력, 주민교실도 만들어서 여러 가지 활동도같이 했어요. 그런데 결국에는 마을엔 자립이라는 것이 쉽게 그렇게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즐거웠던 4년 동안의 마을운동이라고 하고 접었어요. 나는 비록 실패했지만, 지금은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브나로드같이 옛날로 돌아가기 맥락도 있지만 어쨌든 귀농, 귀촌도 많아지고 거기서 문화예술활동을 접목해서 마을 사람들과 활동하는 일이 상당히 많아졌어요. 이것은 내가 영향력을 다 미친 것은 아니지만 100분의 1이라도 활동을 같이 했던 사람들의 영향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요. 꼭 실패한 것만은 아니라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건 참고로 하시라고 해 놨는데, 참고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도 스스로 자기 자신을 문화예술 쪽에 노출해서 항상 감성을 개방해야지만 바이러스처럼 다른 사람에게 전염됩니다. 꼭 닫아놓고 있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춤을 열심히 추고, 자기 자신의 감성을 열어놓으시길 부탁드리면서 끝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원재(사회자): 선생님 말씀 감사합니다. 한 가지는 확실히 성공하신 거 같아요. 저는 선생님 때문에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요. 아직 모자란 게 선생님은 음악만 있어도 춤을 추시지만 저는 술까지 있어야 춤을 춥니다. 음악만 있어도 춤을 출 수 있게 될 날을 기다려 보겠습니다. 1부는 마치기로 하고요. 잠깐 쉬었다가 2부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