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더봄
- [2013-1 방담회] #1. 마을에서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고영직 _문학평론가
- 201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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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을에서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고영직 : 앞에 마을에서 살아가기 위한 함께 살기 위한 마을, 죽어가기 위한 마을 이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마르케스의 소설 중에 백년의 고독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다. 거기 우루술라라는 할머니가 등장하는데, 할머니가 마콘도라고 하는 가상의 마을에서 쫒겨나게 생겼는데, 이때 이 곳을 떠날수 없다고 하신다. 그때 그 할머니가 하시는 대사가 떠올랐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는 말. 누군가가 죽었더라고 하면, 그 곳을 떠날수 없는데 죽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떠날수 있다라는 거다. 누군가가 죽어서 그 땅에 묻혔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기억이며 압축파일처럼 우리에게 문화적으로 전승되어 나오는 힘이 거기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살기 위한 마을, 같이 살기 위한 마을은 지금 정책 사업이나 담론을 통해 많이 나오는데, 같이 죽기 위한 마을로서의 그런 이야기는 처음들어서 신선했고, 그런 점이 발제에서 재밌는 대목이었다.
- 강원재 :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이야기인것 같다. 우리가 사는 것은 삶에 대한 욕구도 있지만 죽음에 대한 욕구도 있고, 그것을 연장시키며 그 사이사이에서 의미있는 삶을 만들어 가는거다. 문화예술교육은 그 사이에서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활동인것 같다.
- 박형주 :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마을 만들기라는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양질의 삶을 살아가는것에서 문화예술교육이 관계를 재구성한다거나 생산적 활동으로서의 문화예술활동이 아니라 여가적 시간을 소비하기 위한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 이 삶을 여유를 부리고 이렇게 살수 있다는 환상을 유지하게끔 가는데, 문화예술교육이 그 기능을 오히러 더 도와주고 있는것이 아닌가. 마을의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게 떼내는 작업을 문화예술교육이 하는것 아닌가. 마을과,공동체와 문화예술교육이 어떻게 만나야 하느냐라고 물었을때, 결국 교육이 만남에서 시작을 하는 것이지 않나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것이 지금 왜 가면 갈수록 사업이 안되어 질까하는 의문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마을에서의 문화예술교육을 가야 할까 했을때 이 발제 안에 힌트들이 담겨있다고 생각을 했다. 큰 이야기는 다 나왔기 때문에 혹시 좀 더 이 부분에서 같이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 지점이 있는지 묻고싶다.
- 강원재 : 마을이라는 곳에서 문화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화예술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런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다. 도시마을에서의 도시에서의 문화예술과 시골, 자연이 있는 곳에서의 문화예술은 또 다른것 같다. 도시 안에서는 도시 공간 자체가 삶을 살기 위한 생산, 거래, 소비 이것이 자본주의가 짜놓은 방식이라고 하면 도시는 생산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공간이 되어 있다. 거래와 소유밖에 없는것이다. 인간이 생산하지 않고 살수 있는가. 자기의 전인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라고 할때 불가능하다생각한다. 문화예술이 유일하게 도시에서 생산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것은 직접 자연의 노동을 통해 거기서 생산을 일으키는것이 아닌 가생산일수도 있다. 문화예술이라는 것은 도시에서의 삶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할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든다. 그 지점에서 문화예술교육에서 요리를 접목을 시키는데 그것도 요리하는 행위들이 비슷한게 있는것 같다. 문화예술이 생산을 담당하며 사람을 치유하고, 그 안에서 내적 충만감을 만들어가는것 만큼이나 요리에서도 그런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교육적 과정으로 끌어온다. 그럴때 도시에서의 생산이라는 것이 없어진것이 대한 문화예술교육의 역할이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고영직 : 그런 논의도 해보고, 학교와 마을의 관계 중요한것 같다. 방금 이야기 한것이 삶의 기술로서 예술교육 테마로 하나 이야기 할 수 있을것 같고. 관계의 설정을 이야기 하는데, 관계자체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면 좋겠다. 결국엔 우리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공동체라고 하는게 폐쇄된 공동체가 아니라는거다. 그들만의 타워팰리스 식의 공동체가 아니라는 측면이 있는것 같다. 이런 논의를 몇개 범주를 넣어서 하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어떻게 죽기 위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낼 것인가를 다시 논의할수 있을것 같다.
산문 시 중에 이런 시가 있다. 어떤 여자분이 매일 자기가 다니는 길에 할머니가 앉아계셔서 인사를 했다. 익숙해진 후에 할머니는 매번 어디가냐고 물어보셨다. 그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매번 어디가냐고 물어보신다. 그런데 오늘은 할머니가 참 예쁘다, 젊다고 이야기 하셨다. 고맙다고 돌아섰는데 스스로 눈시울이 젖게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시가 있다. 이 시가 창작되는 과정. 나는 이 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일상과 생활에서 써지는 시고, 할머니가 늙어서 죽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와 인사하는 사이이자 자기에게 깨달음을 주는, 뭔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그 느낌을 줬다는 것이 예쁘고 젊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것이 아니라 할머니와 나의 인생 전체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예술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이고 그리고 이것이 문화예술교육적으로 쓴다면 그 시를 좋아서 가져가서 쓴다는것이다. 지원을 받고,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 간극 사이에서 무언가 탐구가 필요하다. 내가 생각할땐 도시는 공동체에 대한 경험이 없다. 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이고. 폐쇄적 공동체를 도시에서 구성하려고 해도 할수도 없다. 생활협동조합도 생산수단을 공유하는데서 조합이 만들어진다. 생산수단과 노동관계에서 공동체를 이야기 할수 있을 뿐이지 아직 취미하거나 수다떠는 모임을 공동체라고 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공동체는 개폐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수단과 상호관계에 대한 문제가 있는거고. 예술과 생산체계에 대한 문제가 어떻게 연결되느냐를 고민해야 한다.
- 고영직 : 스스로 살 수 있는 힘을 주게 하는것. 이게 어쩌면 본질일수 있다. 관계 또한 그것이 전제되지않은 관계가 얼마나 허약하겠나. 그것이 예술이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또 교육의 지향도 사람의 변화에 있는건데. 자립할 수 있는 인간이 많아져야 마을에서 다른 사람과 자치하는것이 사는것이 가능하다. 자립에서 자치로 가는것이다. 그것을 문화예술이 프로세스적 의미의 과정이 아니라 수행적 과정으로 수행해 나가는게 예술교육의 큰 역할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것이 안되는 이유는 마을에서 더불어 뿌리내리고 살수 있는 인간이 적어져 없기때문이다. 정주성. 반지하도 10몇년동안 하다가 이사갈수밖에 없고 경험이 휘발되는 것이 아닌가. 소중한 경험들이 휘발되는 양상들이 어찌보면 안타깝기도 하다. 어떤 생태학자가 멋진 슬로건을 이야기 하던데, ‘나는 장소이다’ 라는 것이었다. 마을에서의 예술교육을 진행하고 어쩌면 그런 것을 해나가는 방식이 나는 장소이다라는 것을 자기 몸과 마음속에 구현 내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뭔가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것이 필요한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자본화되며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어 있고. 일터는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로 작동되고 그나마 좀 남아있는 것이 삶터인데, 삶터자체. 민주주의는 결국엔 특정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삶터의 중요성이 있는데, 문제는 삶터를 예술교육을 통해 어떤 삶터로 만들 것인가. 추상적인 삶터가 아니라 즐겁게 놀 수 있는 놀토로만드는것이 예술교육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식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 방담회 순서
#0. 프롤로그 : 마을에서의 교육을 사유하다 [Click!]
#1. 마을에서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Click!]
#2. 삶의 기술을 담은 문화예술교육 '장소'로서의 마을에 대해 생각한다 [Click!]
#3. 나오기 : 마을에서의 '경험교육'이 가능하려면, [Cl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