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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의 격(格)은 어디에서 오는가
  • 고영직 _문학평론가
  • 2014.12.13

 

  사람의 격(格)을 생각한다. 사람의 격보다 아파트의 명예가 더 중시되는 사회에서 과연 우리 삶의 격은 제대로 보장되고 있는가. 삶의 격이란 사람이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이다. 삶의 격이 존중되는 사회는 사람의 존엄성이 제대로 구현되는 품위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당신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 사회에 사람의 격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사는 세상 자체가 포식자 세상이 된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이제 사람은 더 이상 존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쓰다 내버리는 물건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런 사회에서는 누구랄 것 없이 소비사회의 노예가 되어 오직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에서 자신의 결핍된 만족감을 채우려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소비사회에 탐닉하면 탐닉할수록 소비사회에 더 중독되어 시기심의 문화를 견고히 형성하게 된다는 점을. 이른바 ‘남들처럼’의 덫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악무한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최근에 출간된 최인석 소설 『강철무지개』는 그런 사회가 지향하는 근미래(近未來)의 끔찍한 디스토피아에 대한 문학적 악몽이라고 보아도 좋으리라. 그들만의 고립된 공동체(gated city)인 SS 울트라돔에 사는 작중 인물들은 시장사회의 교환가치에 몰두한 나머지,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사용가치의 의미를 전혀 행사하려 하지 못한 채 극도의 무력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오직 “대세(大勢)를 따르라!”라는 정언명령을 숙명처럼 행동의 매뉴얼로 내면화하는 소비사회에서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고민 자체가 전적으로 빠져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나키스트 테러 집단에 가담한 ‘지연’이 끝내 SS 울트라돔을 폭파하려는 장면에서 누군가의 피조물이 아니라 자신의 조물주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을 술회하는 장면이 퍽 강렬하다. 나는, 우리는, 과연 피조물로서 살고 있는가, 나 자신의 조물주로서 살고 있는가. 

 

  이 점에서 이반 일리치가 소책자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1978)에서 “사양합니다(No, Thank You!)”라고 한 거부의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니오’의 용기와 아름다움에 대해 성찰하는 행위일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대량생산된 상품과 서비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살면 살수록 행복한 삶 내지는 삶의 격과는 거리가 멀어진다고 주장한다. 그가 시장 밖에서 만족을 얻을 기회가 사라진 가난의 현대화 현상을 비판하며, 그것을 극복하려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자신의 사용가치를 회복하자고 역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시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선택한 결과,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그 결과 “자율은 무너지고, 기쁨은 사그라지고, 경험은 같아지고, 욕구는 좌절되는 과정에 있다”고 이반 일리치는 말한다. 

 

 이반 일리치는 시장에 의존하는 지금의 근대 시스템의 경제와 문화는 끊임없이 자급 중심의 경제와 문화를 파괴한다는 점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가 시간을 잡아먹는 초고속 교통(『공생을 위한 도구』), 병을 만드는 의료(『의료의 한계』),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교육(『탈학교사회』) 같은 이른바 ‘근대’적 시스템의 문제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유하려 한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책의 2장에서 ‘전문가의 제국’을 신랄히 비판하고 탄핵하는 것에서 그런 의도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전문가의 관리에서 벗어나 대중의 결단과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라고. 전문가에 대한 존경 따위는 이제 거두고 ‘의심’을 하자고 제안한다. 이반 일리치가 사용가치의 자율적 창조를 위한 저항의 방법으로서 ‘공생의 정치’를 역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법하다. 공생의 정치란 저마다의 사용가치를 만들 수 있는 자유를 공정하게 분배하기 위한 저항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나와 당신은 나와 당신 안의 사용가치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사용가치를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품 위주로 만들어진 삶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시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에서는 오직 ‘명사(名辭)’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 명사로서의 삶 대신에, ‘자동사(自動詞)’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자동사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교육’ 대신에 ‘배우다’의 감각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고, ‘건강관리’가 아니라 스스로 ‘낫는다’라는 것을 의미하며, ‘교통’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움직이다’라는 내 안의 능력을 실제 삶에서 직접 구현하려는 태도와 습관을 의미한다고 이반 일리치는 말한다. 시장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이른바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The right to Useful unemployment)를 실제 삶에서 구현하자는 것이다. 스스로 행동하고 그 과정을 회상하면서 생겨나는 즐거움에 의해서만 만족감을 주는 필요를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전근대적 삶으로 돌아가자는 주장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 안의 사용가치를 회복하자고 한 이반 일리치의 주장이 온전히 구현된 삶의 현장이 있었다. 나는 지금 과거형 시제인 ‘-었’을 사용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리고 이것은 점차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스웨덴 출신의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1991)는 그 생생한 실체라고 확언할 수 있다. 생태학 분야에서 이미 현대의 고전이 된 『오래된 미래』에서 저자는 ‘반개발’의 구체적인 아이디어로서 탈중심화와 적정기술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화에 맞선 지역화의 원리와 자립의 경제학을 강조한 셈이랄까. 

  실제 히말라야 산군(山群)에 위치한 라다크는 수천년 동안 자급의 경제와 자립의 문화를 유지해왔다. 자립에서 오는 검소한 삶은 라다크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일종의 문화적 유전자로 깊이 각인되었다. 십수년 만에 다시 이 책을 보며 새롭게 발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집에서 부리는 동물을 마음을 다해 존중하는가 하면, 부엌이 집의 심장인 가옥구조와 여성 위주의 살림살이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관계의 사슬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아이로 성장하는 교육 시스템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서로 간에 상호의존하며 협동하는 문화가 뿌리 깊이 작용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나이 든 사람들도 젊은 사람들과의 계속적인 접촉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이러한 공존과 상호의존성의 문화가 가능한 라다크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예가 동사 ‘이다, 있다’에 있다고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말한다. 동사 ‘이다, 있다’를 말할 때, 자신이 직접 참여하지 않은 일은 그들의 지식이 제한된 것임을 표현하는 동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반 일리치가 말한 사용가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전통 라다크 사회는 붕괴되고 있다. 서방을 비롯한 외부세계에 개방되면서 라다크 사람들의 자치의 정치와 자립의 경제가 날로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땅에서 ‘분리’되는 현상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일하는 곳이 달라진 것이다. 상호의존을 근간으로 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는 이제 서로서로에게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내 안의 사용가치가 크게 훼손되었고, 교환가치를 숭배하는 이른바 ‘시장형 인간’들이 대량으로 양산되었다. 서구식 방법의 학습은 아이들을 좁은 전문가가 되도록 훈련시키면서 그들의 문화와 자연으로부터 떼어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자신의 문화에 대해 열등감을 내면화하도록 독촉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래는 부끄러운 듯이 부르지만, 영어와 힌두어 노래는 아주 신이 나서 부른다고 어느 아이가 한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사람의 격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우리는 이 점을 성찰하고 우리 삶에서 직접 구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 방법이야말로 우리 삶과 사회의 행복도를 높이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한다.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나와 당신은 너무 잊고 산 것은 아닐까. 커뮤니티 교육 전문가이자 미국 전환운동을 대표하는 활동가인 세실 앤드류스가 『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에서 이른바 ‘거실혁명’을 제안하고 주창하는 것도 삶의 전환과 문명의 전환을 위한 운동의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거실을 외부에 개방하며 이웃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작당(作黨)하자고 권유한다. 그런 유쾌한 작당이야말로 나를 바꾸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연결의 고리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월든』(1854)을 쓴 자연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교사이며, 전 우주가 교실이다”라고. 세실 앤드류스는 소로의 위 말을 이어받아 거실혁명을 위해서는 학교 교사가 아니라 ‘맨발의 교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합리주의와 이상주의를 동시에 품고 있는 ‘진정성’이 있는 교사 말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 등장하는 ‘아이’를 연상하면 이해가 더 빠를 것 같다. 결국 작은 용기가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우리는 누구나 존엄한 삶을 살고자 한다. 사람의 격보다 아파트의 격이 더 중시되는 사회를 용인하는 체제에서 제대로 된 (문화예술)교육이 가능할 수 있을까. 교육이 새로운 문화적 공동성의 지반을 형성해야 함은 물론 소비자로서의 정체성만을 유독 강조하는 지금의 문화를 조금씩 바꾸어야 한다.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대한 우리 안의 ‘척도’ 자체가 달라져야 함은 물론이다. 나와 당신은 지금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런 삶을 살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위 책들을 읽으시라. 그러면 나와 당신은 지금보다 ‘조금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리고 내 안의 사용가치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작은 변화는 시작되리라. 맨발의 교사는 누구인가. 바로 당신 자신이어야 한다. 우리는 공동체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