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넘봄
- 민주적 환경이 민주주의교육 낳는다
- 고영직 _문학평론가
- 2014.09.25
나는 영훈초등학교를 나와서
국제중학교를 나와서
민사고를 나와서
하버드대를 갈 거다.
그래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정말 하고 싶은
미용사가 될 거다.
_ 부산부전초1 박채연 동시 「여덟 살의 꿈」
어느 초등학생이 쓴 위 시를 우연히 발견하고 한동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문학평론가로서 장담하건대, 훗날 이 아이는 자신의 꿈인 ‘미용사’가 되거나 아니면 뛰어난 ‘저항시인’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 문제를 이렇게 통렬히 풍자한 시를 나는 최근 수년간 별로 접하지 못했다. 이 시에 곡을 붙여 2013년에 열린 <이오덕동요제>에 참가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있으니 직접 확인해 보시라.
교육의 주인은 누구인가. 학생인가, 부모인가, 교사인가, 아니면 관료인가. 우리나라 공교육 현장에서 학생(학습자)이 자기주도성을 구현하는 교육과정이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하늘이 알고 있고 땅도 알고 있다. 일부 교육청에서 혁신학교 같은 제도 도입을 통해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현장에 불어넣고 있으나, 이러한 교육자치의 토대는 여전히 취약한 실정이다. 최근 교육부가 창의․융합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는 <2015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총론 주요사항>을 발표한 것은 하나의 비근한 예가 된다. 졸속으로 추진되는 교육과정 변화가 어떤 식으로 학교 현장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교육자치의 정신을 훼손할 것인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드높다.
백번 양보해서 창의․융합 인재 양성이라는 교과과정 개편의 취지를 인정한다고 하자. 그러나 학생들의 자기주도성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교육과정은 개악(改惡)에 불과할 수 있다. 차라리 어느 논자가 “예술(교육)이 교육의 전면과 중심에 배치되어야 한다”(제시카 호프만 데이비스)고 한 주장이 나는 백번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주도성이 가능성이다’라는 점을 이해하고, 학생(학습자) 스스로 배움을 터득하는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현장에서 (예술)교사들이 얼마나 실천하느냐 달려 있는 것이다. 교육과정에서 학생(학습자)의 자기주도성이야말로 교육에서의 민주주의의 핵심 요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존 듀이가 “생각이든 개념이든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을 보라. 학생(학습자)이 배움에서의 자기주도성을 얼마나 구현하느냐가 얼마나 교육에서 중요한지를 역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배움과 가르침이 상호작용하는 교육과정은 “교사의 머리에서 학생의 공책으로 지식을 옮겨 적는 것이 교육의 목적은 아니다”(도널드 L. 핀켈)라는 점을 이해하고 기존의 제도와 정책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데에서 출발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창의․융합 인재 양성은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이 점에서 도널드 L. 핀켈의 『침묵으로 가르치기』는 좋은 참조점을 제공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교육 현장에서 ‘침묵’으로 가르치는 방식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이 책은 단순한 교육 솔루션에 관한 책이 아니다. 에버그린주립대에서 오랫동안 인문학을 가르치다 퇴임한 저자는 학생 주도적인 토의와 탐구, 글쓰기 지도 같은 교육방법론이 갖는 효과를 경험적 진실을 바탕으로 강조한다. 이 의미를 핀켈 교수는 ‘개념의 의미에서 기능으로’라고 풀이한다. 교사(교수자)의 말이 아니라 배움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만 개념의 기능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위대한 스승’을 버려라”라는 말에서 핀켈 교수의 확고한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핀켈 교수의 교육방법론은 오랜 교육 경험에서 우러나온 교육철학에 근거하고 있다. 교육의 목적은 교사의 가르침이 아니라 학생들의 배움에 있다는 핀켈 교수의 주장은 우리나라 (예술)교육 현장에서 깊이 음미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침묵으로 가르치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책이 말하게 하라, △학생이 말하게 하라, △교사와 학생이 함께 탐구하라, △친숙한 글쓰기로 말하라, △학습을 일으키는 경험을 설계하라, △민주적인 선생님이 되어라, △동료와 함께 가르쳐라, △경험을 제공하고 생각을 불러일으켜라…… 같은 다양한 방법론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직접경험과 성찰경험을 줄 수 있는 좋은 책 추천, 토론수업, 탐구, 글쓰기, 경험, 정치적 경험 같은 방법론인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예술)교육 현장에서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침묵으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사 자신이 더 많이 준비하고 공부해야 하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나 또한 대학생 및 성인 대상의 <글쓰기 수업> 때 빨간펜 대신 ‘편지 쓰기’를 몇차례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학습자들의 글을 일일이 읽고 코멘트를 다는 일은 중노동과 다를 바 없었다는 점을 이 자리에서 이실직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켈 교수는 이 방법론을 고수한다. 그가 존 듀이와 피아제 같은 교육철학자들의 생각을 자신의 교육철학에 원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1장에서 제시한 핀켈 교수의 질문은 나 또한 교육 현장에 임할 때마다 언제나 항상 생각하는 화두가 되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고 가장 중요한 지식을 배운 경험 두세 가지를 떠올려보자. 이를테면 살면서 오래도록 중요한 영향을 미친 배움의 순간이나 사건을 적는다.” 이 질문에 대해 학생들이 써낸 답을 보며 핀켈 교수는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예외가 있긴 했지만, 중요한 지식을 배운 중요한 사건은 대개 학교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교사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라고. 핀켈 교수의 이 언급은 우리나라 공교육 현장에서도 다를 바 없으리라.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핀켈 교수의 교육철학과 방법론에 대해 생각하고 접목해 보려는 시도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탐구하는 탐구 중심 수업을 설계할 때도 그렇고, 학습을 일으키는 경험을 설계할 때 응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교육과정에서의 민주주의를 생각할 때 “환경이 말하게 하라!”라고 한 핀켈 교수의 주장은 우리 (예술)교육 현장에서 결코 외면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민주주의가 아니던가. 민주주의를 말로 가르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왜 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중요한가. 그것은 결국 ‘함께 살기’의 원리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론이
되기 때문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노들장애인야학 교사인 홍은전이 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라는 책은 우리나라 (예술)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보며 배움이 일어나는 ‘교육’과 ‘운동’은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무수히 던지고 사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들장애인야학 스무 해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1993년에 개교한 노들장애인야학이 스무해 동안 산전수전과 공중전을 거치며 중단 없는 배움과 운동을 실천해온 과정을 감동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라는 이 책만큼 올해 읽은 책 가운데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군 책이 없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다음 문장에 있다. “우리는 운동이 없는 배움, 단지 기능적 학습일 뿐인 배움을 ‘배움’의 이름으로 단호히 거절해야 하며, 또한 배움이 없는 운동, 그저 습관이 되고 관성이 된 운동에 대해 ‘운동’의 이름으로 맞서야 할 겁니다.” 교육이 절대 눈 감지 말아야 할 것과 운동이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것에 관한 책인 셈이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 우리나라 장애인운동의 역사에서 노들장애인야학은 언제나 항상 운동의 진앙지였다. 2000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비롯해 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 사회적기업(현수막 공장), 탈-시설운동 그리고 최근 광화문에서 가족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해 만 2년째 농성 중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노들장애인야학은 항상 운동의 최전선에 있었다. 그러나 배움의 등불이 잠시라도 꺼진 적은 없었다. 대학로에서 천막을 쳐놓고 수업을 진행한 것은 유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배움과 운동 과정에서 말 그대로 ‘삶의 공동체’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중증장애인들이 장애인극단 ‘판’을 만들고, 노들음악대를 만들어 연주를 하고, 인권강사로서 학교 현장에서 당사자로서 강의를 하는 등의 이야기는 무엇이 불능(不能)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누군가가 야학에 참여한 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마치 염색(染色)한 것 같다고 한 말을 쉬이 나는 잊지 못하리라. 박경석 교장의 말처럼, “너희 안에는 게바라도 있고 프레이리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지난 2010년 교육방송(EBS) 교육대기획 10부작으로 방영되어 화제를 모은 방송 내용을 책으로 엮어낸 『아이의 발견』도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널리 읽힐 필요가 있다. 교육과정에서의 민주주의를 고려할 때, 이 책에 나오는 <정치교육 프로젝트>는 참조해 볼만하다. 정치판에 뛰어든 초딩들이 선의의 정책토론 배틀을 하며 수준 높은 정치의식을 함양하는 과정은 프로젝트 수업의 교육적 효과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놀이정신에 대한 역설이다. 공부는 나중에 할 수 있지만, 모래놀이는 어릴 때밖에 하지 못한다. 바로 놀이정신이야말로 문화예술교육의 처음이자 끝이 아니던가. 그런 놀이 과정에서 아이들(성인들 또한!)은 자기주도성, 자기조절력, 사회성, 자존감을 느끼게 된다. 텔레비전에 방영된 방송을 보며 이 책을 같이 보면 문화예술교육을 설계할 때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창의․융합 인재 양성은 우리나라 교육의 지상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목표는 오직 표준화된 성과와 경제성만을 우선시하는 우리 현실에서 과연 길러질 수 있을까. 지난 7월말 방한한 미국 교육자 크리스 메리코글리아노가 ‘아동기의 소멸’ 현상에 대해 그토록 비판한 것도 그런 인재를 양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이들(그리고 성인들!)의 ‘야생성(wildness)’을 회복할 수 있는 문화예술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맥락이 아니던가. 우리 (예술)교육 현장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놀이정신을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교육과정에서의 민주주의를 깊이 고민하고 작은 실천을 할 시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에 <추천사>를 쓴 누군가가 “교육은 교육 바깥에서 희망이 되었다”(이계삼)라고 쓴 문장이 내 뇌리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진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