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넘봄
- ‘세계감(世界感)’을 위한 예술교육
- 고영직 _문학평론가
- 2014.06.23
지지봄봄 10호 _ 관련 서적 소개
‘세계감(世界感)’을 위한 예술교육
_ 고병권 『철학자와 하녀』(메디치 2014)
_ 조너선 코졸(김명신)『교사로 산다는 것』(양철북 2011)
_ D.H.로렌스(류점석) 『제대로 된 혁명』(아우라 2008)
고영직 | 문학평론가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예술(교육)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미국 작가 수전 손택이 “문학은 더 큰 삶, 다시 말해 자유의 영역에 들어가게 해주는 여권(passport)”이라고 한 말이 떠오르는 시절이다. 여기서 ‘문학’이라는 말 대신에 ‘예술(교육)’이라는 단어를 넣어도 무리 없을 것이다. 수전 손택이 역설한 것처럼, “아름다움에 압도되는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억센 것”이라는 오래된 믿음이야말로 지금 여기에 필요한 감수성이라고 확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은 어느 시인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관(世界觀)이 아니라 ‘세계감(世界感)’이라고 한 표현과도 통하는 어떤 것이리라. 이문재 시인이 쓴 「오래된 기도」라는 시를 세월호 참사 이후 자주 들여다보곤 했던 것도 그런 ‘세계감’을 기르는 감수성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나의 생각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나는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 기도하는 것이다”라는 이문재 시인의 표현에 자주 울컥하곤 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자주 던져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물음이 특히 필요하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 교육 현장에서 갈수록 ‘안전 신화’는 견고해지고 있고, 이른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처세술을 자녀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적극 유포되고 있다는 의문이 들곤 한다. 학교 안과 밖의 교육 현장이 갈수록 경화(硬化)되는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난 5월 복수의 여야 국회의원들이 <수영교육 활성화 방안 토론회>를 개최하려다 취소한 사건을 보라. 토론회를 알리는 포스터 문구에 세월호 참사를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자리”라는 문구를 보고 나는 기함하는 줄 알았다. 아마도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실수도 아니고, 단순한 해프닝은 더욱 아니다. 우리는 이 체제 ‘바깥’을 전혀 사유하지 못하고, 전혀 상상하지 않으려는 후천적 상상력 결핍 증후군을 심하게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세상에서 세상 자체가 위험한데 내 아이는 안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정신승리법에 불과하다. 지금 여기에 유포되는 각자도생의 처세술이란 실상 지배 세력에 의해 언제든지 ‘각개격파’ 당하기 쉬운 통치술의 한 형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이들 내면의 야성(野性)의 힘을 복원하려는 문화예술교육이 필요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마치 거푸집으로 형상을 뜨듯 판에 박힌 아이들을 대량으로 주조(鑄造)하는 지금 여기의 교육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우리는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진보 교육감들이 여럿 당선된 것은 그런 변화의 열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교육 현장의 변화가 필요하다. 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지적 수준을 자랑하던 독일 공립학교에서 수학한 인재(人才)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인재(人才)들이야말로 어쩌면 인재(人災)라는 사유의 전환이 요구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작은 용기를 갖추고, 예의 ‘세계감(世界感)’의 감각을 느낄 줄 아는 아이들을 생각하는 문화예술교육 과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철학자 고병권 식으로 말하자면, 그런 아이들은 어쩌면 ‘야만인’의 덕목을 갖춘 사람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법하다. 고병권은 산문집 『철학자와 하녀』에서 「야만인을 기다리며」라는 카바피(1863-1933)의 유명한 시를 인용하며 “너는 애국시민을 원하니? 나는 야만인을 기다린다”라고 말한다. 카바피의 시에 등장하는 야만인이란 로마제국을 멸망하게 한 역사 속 야만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병권은 이 시의 의미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유한다. 나와 우리 자신을 동일자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진정한 타자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시민들이 야만인의 도래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동일자로서의 한계를 자각하게 되고, 제국(帝國)의 불가능성 자체를 되묻게 된 것처럼! “그들의 도래는 법과 권력의 정지이자 학자와 웅변가의 침묵이다”라고 쓴 표현에서 고병권이 왜 야만인론을 역설하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법이 멈추고 말이 멈추는 시간, 법(혹은 문법)의 외부 지대에 서게 된 시간. 나는 카바피의 야만인들을 벤야민의 메시아처럼 느꼈다”라고 쓴 표현이 결코 과장이 될 수 없음을 나는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이후에 직시하게 된다. 지금 여기의 폐허를 응시하려면 그런 강력한 마음의 힘과 새로운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병권이 마이클 샌델 식 정의(Justice)론보다 니체 식 비르투스(virtus)의 의미를 더 강조한 맥락 또한 여기에 있을 법하다. 니체의 비르투스의 의미는 지금 여기 문화예술교육에서 요청되는 핵심적인 덕목이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도대체 덕이란 무엇인가? 니체의 입을 빌려보자면, 진정한 힘, 비르투스는 내게 닥치는 운명(fortuna), 그 우발성에 기꺼이 자신을 여는 것이고, 그것을 기꺼이 다루려는 힘과 의지이다. 비르투스는 통제할 수 없는 운명과의 싸움이 아니라 그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그것은 친숙한 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낯선 것, 내게 운명처럼 나타난 타자에 대한 사랑이다. 우발적으로 닥치는 타자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기꺼이 개방하려는 의지와 힘 속에서 공동체는 유덕해지고 정의로워진다.
고병권은 이 책에서 ‘철학은 지옥에서 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나는 위 명제의 의미에 대해 지금 여기 문화예술교육 현장 또한 더 적극적으로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경우에만 지옥에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자각과 개안(開眼)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고병권이 노들장애인야간학교 교육 사례를 분석하며 ‘배움 이전의 배움’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공부를 하라”라고 한 대혜 스님의 말을 인용해 새로운 ‘공부론’을 강조한 것도 지옥에서 철학하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곁에 있어 줌’의 존재론」이라는 짧은 에세이를 보며 큰 일깨움을 얻었다는 점을 여기에 고백하려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있어줌’. 이 말에서는 ‘있음’과 ‘줌’, 다시 말해 ‘존재’와 ‘선물’이 일치한다. (중략) 그러니 ‘있음’이 곧 ‘줌’이다. 존재가 선물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나를 너에게 선물하자”라고 말하는 ‘있어줌’의 존재론은 결국 우리 시대 ‘교사론’의 의미와 통한다고 보아도 좋을 법하다. 미국의 위대한 교사 조너선 코졸의 『교사로 산다는 것』이라는 책이 우리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음미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너선 코졸은 이 책을 비롯해 여러 책들에서 ‘교사론’을 역설한 진정한 교육자라고 할 수 있다. 1965년 수업 시간에 인종차별에 저항한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의 시를 읽어주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해고되는 등 특히 빈곤층 아이들과 수십년 동안 교육을 진행해온 교육자로 잘 알려져 있다. 1985년부터 가난한 아이들의 영혼을 말살하는 뉴욕 도심의 죽음의 수용소 같은 학교를 찾아 25년간 아이들과 인연을 맺어온 과정을 기록한 『희망의 불꽃』(열린책들)이라는 책이 최근 국내에 소개되었다. 조너선 코졸은 교과서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불복종교육을 실천하는 교사론을 역설한다. 저마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특정의 유․무형의 관습들과 제도들에 순치되지 않으며, 재미를 위한 상상력의 혁명을 구현하려는 교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이 점에서 영국 작가 D.H.로렌스(1885-1930)의 시집 『제대로 된 혁명(A sane Revolution)』에 나오는 시들의 의미가 간단치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로렌스는 누구보다 근대의 제도와 습속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저항하려 한 작가였다. 로렌스는 저 하늘의 ‘초월성’에 의존하지 않으며, 나와 우리 안의 ‘내재성’에 눈을 뜨려는 강렬한 충동과 새로운 사유에 대해 역설한다. 어느 시에서 “하느님이 태어날 때까지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하느님은 태어난다」)라고 쓴 표현에서 로렌스의 예술정신을 여실히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돈을 없애라」, 「제대로 된 혁명」 같은 시들에 나오는 로렌스의 전복적인 시정신이야말로 새로운 사회문화의 궤도(volution)에 진입하려는 상상력의 수원지가 되기에 충분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자주 돈이라는 ‘마몬’을 숭배하지 않았던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들을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온 것이 아닌가?
우리 노동을 폐지하자, 우리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_ D.H.로렌스 시 「제대로 된 혁명」 끝부분
로렌스가 역설하는 “재미를 위한 혁명”은 지금 여기 문화예술교육이 표방하는 궁극적인 가치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를 향한 교육이다. 탐욕, 몰염치, 무책임은 우리 시대의 병통이 아니던가. 협박 경제를 속성으로 하는 이런 시대에 질서 바깥을 사유하고 성찰하는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은 물론이요 우리 아이들의 미래 또한 더 암울해질 것임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이전처럼 계속되어야 한다”라는 슬로건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우리 사회 지배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당신은 행복하신가?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이 지상에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던가. 이 변화의 과정에서 문화예술교육이 사유와 성찰 측면에서 새로운 ‘전복’의 가치를 구현하는 상상력의 지렛대 구실을 할 수 있기를 나는 희망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해 ‘세계감’을 생각하는 아이들이 탄생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품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너선 코졸의 감동적인 말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학생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은 공책에 필기한 내용도 아니고, 교과서에 인쇄된 궁색한 문장도 아니다. 그것은 수업하는 내내 교사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시지다.” 우리 문화예술교육 현장에는 교사의 빛나는 눈빛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경기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http://www.gbo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