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넘봄
- 우리는 어떤 성장을 꿈꾸는 걸까?
- 장혜윤 _경기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 201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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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억셉티드>(Accepted)의 주인공 ‘바틀비’는 여러 대학에 지원서를 냈지만 안전한 지망이라고 생각했던 대학에서조차 불합격 통지서를 받는다. 학교에는 바라던 대학에 합격해서 환호를 지르는 학생도 있고, 어릴 때부터 명문대만을 목표로 준비했으나 떨어진 학생도 있고, 장학금이 없어서 대학에 갈 수 없는 학생도 있다. 이 영화 속의 풍경은 한국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성공적인 삶을 원한다면, 누군가가 되고 싶다면, 당연히 대학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바틀비 부모님의 생각은 미국 사회의 어떤 통념, 한국 사회의 어떤 통념과 매우 닮아 있다. “넌 어느 대학 가니?” 묻는 이웃의 질문은 대학에 떨어진 바틀비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어느 대학 가고 싶어?”, “어느 대학 다녀요?”, “어느 대학 나왔어요?”라는 질문으로 그 사람의 과거를 평가하거나 그 사람의 미래를 짐작해보는 무례한 태도를 관심이라는 가면으로 가장하는 경우들을 떠올려보게 되는 장면이다.
그런 짐작과 평가가 난무하는 시기, 바틀비는 부모님을 속이기 위해(만족시켜드리기 위해) 가짜 입학 통지서와 그럴 듯한 가짜 홈페이지를 만든다. 그 가짜 ‘합격 통지서’를 받은 부모님은 처음 듣는 학교 이름을 의심스러워하면서도 매우 기뻐하면서 학교를 구경하고 학장도 만나기를 원한다. 바틀비는 거짓 합격이 들통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폐업한 정신병원 건물을 개조하여 S.H.I.T대학교라는 '그럴 듯한 대학교'를 만들어냈다. 실제로 살지는 않지만 ‘그럴 듯한’ 모델하우스처럼!
눈속임이었던 바틀비의 그럴 듯한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가짜 홈페이지를 보고 지원을 한 학생들이 홈페이지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입학 통보’를 받은 것이다. 바틀비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했지만 학교에 찾아온 학생들이 S.H.I.T대학교 외에는 합격한 곳이 없는 자신과 같은 처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처럼 ‘거부’와 ‘거절’, ‘부족’과 ‘모자람’이라는 ‘평가’에 익숙했던 학생들을 보면서 ‘꿈도, 희망도, 약점에도, Yes!’라고 대답해주는 학교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바틀비는 대학을 경험한 적이 없었으므로 대학이 무엇인지 알기위해 인근 명문대학교를 탐방한다. 그런데 바틀비는 대학 수업의 풍경과 학생들의 모습 속에서 지루한 주입식 수업, 하고 싶은 공부와는 전혀 다른 전공, 스승과 제자라는 이름뿐인 관계, 평가만을 위한 경쟁, 구색만 맞추면 된다는 태도, 모욕이 아무렇지 않은 전통, 관심 없는 수업, 짜여진 틀과 같은 대학 사회의 풍경을 보게 된다.
교과과정을 고민하던 바틀비는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요?”라는 질문의 벽을 만든다. 학생 스스로가 경험하고 배우고 싶은 것들을 적으면 S.H.I.T대학교의 교과과정이 된다. 학생들은 자신이 배우고 싶은 수업을 만들며 서로를 가르친다. 그렇게 하고 싶은 공부에 몰두하며 친구들과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누고 노는 듯 공부하며 시간을 보낸다. 게다가 기숙사 방도 취향에 따라 달리 꾸민다. 자신이 원하는 배움의 경험, 몰입과 자유가 가능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만족감과 성장을 가져다주는 장면들은 정말 영화처럼 느껴진다.
사실, 영화 속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영화처럼 느껴지는 ‘성장이라는 감동’의 장면들이 있기 마련이다. 사회적 욕망과 닦달로만 이뤄낸 성장보다 몰입과 자유가 선사해주는 성장의 장면을 곱씹어보는 맛이 더 깊고 풍부한 것은 ‘그것을 내가 진정으로 배우기를 원하고 즐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삶의 여정에서 그러한 성장이라는 감동의 시간들이 빈약하다면, 그 성장을 축하받을 시간이 빈약하다면, 이는 씁쓸하다 못해 쓸쓸할 일이다.
나는 ‘성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체격만이 아니라 배움과 노동의 과정, 인격 성숙의 과정, 삶이라는 과정을 인정하며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평가’의 다른 이름이라고 본다. 많은 과정과 결과들이 중첩되는 삶에서 ‘성장했다’는 평가는 서툰 삶의 여정에 열정과 위로가 되어 용기를 준다. 이러한 성장은 시험점수처럼 측정하기도 어렵고 한우(韓牛) 등급처럼 가려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느끼는 변화를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다른 존재들에게로부터 축하받고 인정받는 시간을 통해 ‘성장’해가고 있음을 가늠해볼 수 있다.
보통 우리에게 성장을 기념하는 행사로 졸업식, 발표회, 성인식, 생일 등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러나 조금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우리에게 그런 시간은 의례적 의미보다는 획일화된 틀을 따르는 행사이거나 비슷한 패턴의 소비들로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들이 대부분이다. 대학 졸업식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줄어드는 것은 취업 문제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취업만이 대학 과정의 평가가 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배움의 과정조차도 크게 의미가 없었던 것이라면 졸업이라는 의미도 별 다를 것이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에서 교육과정의 결과 학생들이 ‘소비하는 상품’처럼 변했다고 지적한다. 학생은 소비자처럼 기대하는 직업 범주에 들기 위해 필요한 학년과 졸업장을 갖기 위해 행동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죄의식을 느끼도록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그 많은 시험을 보고 그 많은 등록금을 냈던 우리들이 ‘성장에 대한 태도’를 잃은 것인가 뺏긴 것인가 생각하기에 앞서, 소비를 하면서 성장을 느끼기란 참 어려운 일이 아닌가 되묻게 되는 대목이다.
영화 속 바틀비는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다>라는 제목으로 고등학교 졸업논문을 썼다. 바틀비의 논문 제목은 ‘외운 것은 많은데, 아는 게 없는’ 창백한 정신으로 대학에 왔던 나를 요약한 말이었다. 운이 좋게도 교양수업에서 “나는 왜 공부하는가”라는 질문을 듣고 망치로 크게 맞은 듯한 경험을 하고서부터 왜 공부하는지와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며 ‘배우고 싶은 공부’를 떠올리면서 S.H.I.T 대학교의 교과과정처럼 경계가 넓고 다양하진 않지만, 내가 되고자 하는 방향을 조정해가는 과정으로 하고 싶은 것, 찾고 싶은 것을 도전하고 경험하는 시간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노동의 과정과 배움의 과정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인격적인 성장과 사회적 인정이 이뤄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곱씹어본다.
영화에서 아쉬운 점은 그들의 졸업식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직접 디자인한 배움의 과정을 마치고서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졸업식을 만들지를 상상해보았다. 상상이상으로 흥겹고 감동적이지 않았을까. 영화 속에서 빠져나와 S.H.I.T대학교의 약자 뜻보다도 ‘안녕’하지 못한 우리들에게도 서로의 성장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축하하고 기념하는 시간들이 ‘충분하게’ 필요하다고 선언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되묻게 된다. 우리들은 어떤 성장을 꿈꾸는 걸까?
공부는 세상의 발견이고 삶의 연습이다. 삶 속에서 지성의 뿌리를 내리면서, 오롯한 마음을 향해 내면을 닦는 수행이다. 아울러 다양한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잠재력을 두드리는 것이 학문의 보람이다. 배움의 인연 속에서 새로운 자기를 만날 수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만들어간다고 느낄 때, 자기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확신할 때, 인간은 성장한다. 앎에 대한 의지는 삶에 대한 경외감에서 솟아오른다.
_ 김찬호 『생애의 발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