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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자원이 아니라 공유지를 지켜야 한다”
  • 고영직 _문학평론가
  • 2013.08.24

 

 

 괴테의 『파우스트』(1808) 제4막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지배권과 소유권을 회득하고 말 테다! 사업이 전부다. 명성은 무(無)야!”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거래를 마친 파우스트 박사가 이른바 개발 사업에 전념하겠다며 각오를 다지는 장면이다. 이어진 대사에서 "r파우스트 박사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구체적인 개발 사업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나의 눈은 대양을 향하고 있다. (중략) 왕자와 같은 바다를 해변에서 몰아내고, 불모의 광활한 습지를 좁히고, 파도를 바다 멀리 내쫓는 것”이라고. 영원한 성장이라는 환상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근대 화폐경제의 본질과 근대인의 내면구조를 여실히 목격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배(권)와 소유(권)를 향한 파우스트 박사의 무서운 집념과 의지가 실제 후대 역사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화폐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 경제의 결과 제국주의와 전쟁 그리고 자연 착취와 빈부 격차를 당연시하는 파괴적 경제 시스템을 낳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만 살아남고, 사회적인 것은 죽어버리지 않았던가.


 『파우스트』 출간 이후 2백년이 지났지만, 지배권과 소유권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핵심적 사안이다. 당신이 ‘인격’을 가진 개인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재산’을 가졌느냐는 사실이 중요하다. 돈에 입이 달렸다고 해야 할까. 지배권과 소유권 문제와 결부되지 않는 사안은 전무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결국 근대 경제를 성찰한다는 것은 사유화를 넘어 공유된 사회 공간을 상상하고 그런 공유지를 보호하고 확장하려는 사회적 행위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 점에서 경제의 자연화 현상에 대해 한번쯤 의심의 눈길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삶과 다른 세상을 상상하려는 이야기(판타지)의 힘을 신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체제의 바깥을 염탐하려는 상상력의 힘은 변화의 동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의 『희망의 나라로 엑소더스 : 일본 재건 프로젝트』(2000)는 친지역화의 방식으로 탈중앙화한 공동체를 창조하려는 문학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미래소설이다. 열네 살짜리 중학생 1백만 명이 집단 등교거부를 하고, 넷(net)을 기반으로 하여 자산을 축적한 뒤 홋카이도에 ‘노호로’라는 자신들만의 자치공화국을 만든다는 것이 이 작품의 설정이다. 아무런 ‘희망 없는 일본’에 대한 근본적인 개조 욕망 혹은 재건 프로젝트를 향한 무라카미 류의 의식적․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낸 작품인 셈이다. 작품 속 아이들은 문부성으로 표상되는 도쿄 중심의 권위주의 질서와 자본주의 구조에 게릴라 방식으로 맞서고자 한다. 그리고 일본적인 것의 질서로부터 이탈하여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누구를 지배하지 않는 자치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홋카이도에 집단 이주한다. 그리고 다양한 마을 공동체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왜 탈선(脫線)인가. 중학교 2학년 ‘퐁짱’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 나라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정말 많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만은 없습니다.” 이들이 집단 등교거부를 하는 데에는 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 파슈툰에서 지뢰 제거 활동을 하는 열여섯 살 일본인 소년 ‘나마무기’의 인터뷰가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일본적 질서 내지는 일본의 미디어 ‘외부’에 있는 나마무기의 이른바 비국민(非國民)적 언행에 중학생 그룹이 큰 자극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끝내 학교 복귀를 거부하고, 넷을 기반으로 하는 아수나로(ASUNARO)라는 사업체를 설립해 막대한 수익을 창출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방송, 직업훈련소, 노인돌봄 회사, 청소회사 같은 사업체 또한 세운다. 그리고 2005년 무렵 홋카이도에 집단 이주하여 노호로 공화국을 만든다. 에너지(풍력)를 비롯해 도시의 모든 기능이 자급자족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작품 설정에 대해 현실 가능성 운운하지는 마시라.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무라카미 류가 이 작품에서 ‘어떤 미래’를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화폐에 관한 관점과 태도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무라카미 류는 화폐는 신용이 아니라 ‘신뢰가 돈’이라는 관점을 드러낸다. “신용을 창조하면 되잖아요?”라는 퐁짱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홋카이도 노호로 공화국에서 ‘익스(EX)’라는 지역통화를 발행하고 유통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지역통화의 발행과 유통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중앙은행에 의한 독점적인 과잉 발권에도 대항할 수 있고, 불황 때 지방의 통화량이 극감하는 데에도 대응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자 한 것이 아닐까. 또한 일본 사회의 속물(snob)적 속성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예를 들어 경영관리학 석사(MBA)의 M은 무누케(얼간이), B는 바카(병신), A는 아호(바보)라고 비판하고, 노인돌봄센터 이름을 ‘고려장 산’을 의미하는 UBASUTE라고 짓는 식이다. UBA는 노인, SUTE는 버린다는 뜻이다. 일본적 폐쇄성을 넘어 공유된 사회 공간을 상상하려는 무라카미 류의 래디컬한 문학적 사유를 확인할 수 있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 가상소설 형식을 취했다면, 『모모』의 작가로 유명한 미하엘 엔데와 수년간에 걸쳐 일본 NHK 취재팀이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엔데의 유언』에는 근대 경제의 파괴적이고 자멸적인 속성을 극복하려 한 실제 사례들이 여럿 등장한다. 나는 이 책을 보며 『모모』를 착한 자기계발서로 해석하고 소비하려는 시도는 텍스트 너머를 볼 줄 모르는 빈곤한 상상력과 철학의 빈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모』의 진가는 “성장을 전제로 하고 성장을 강요하는 성격을 가진 현행 금융시스템이 이 경쟁사회를 만들어낸 근본원인이다”라는 엔데의 사상을 판타지 형식으로 풀어낸 점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간저축은행의 회색신사는 매드머니(Mad money)를 표상하는 존재로서 해석해야 마땅하다.


 미하엘 엔데는 자본주의 화페경제를 극복하려 한 경제사상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감가하는 돈’ 개념을 제기한 경제학자 실비오 게젤, ‘노화(老化)하는 돈’의 철학을 제시한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 이자가 이자를 낳는 돈의 연금술을 비판한 경제학자 빈스방어와 마르그리트 케네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감가하는 돈 혹은 노화하는 돈이란 저축할 수 없는 화폐를 의미하며, ‘시간이 흐르면 가치가 감소한다’는 실비오 게젤의 자유화폐이론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화폐는 1929년 대공황 이후 독일 슈바넨키르헨과 오스트리아 뵈르글에서 실제로 현실화되었다. 『엔데의 유언』을 쓴 저자들에 따르면, 이 지역들에서 노동증명서 형태로 발행된 대체화폐는 현실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뵈르글에서 유통된 노동증명서의 경우 화폐 유통 속도가 평균 12정도였으며, 체납된 세금도 모두 완납되었다는 것이다. 시의 세금수입 또한 노동증명서 발행 전보다 8배 증가되었고 실업대란도 모두 해소되었다. 어느 경찰의 진술은 퍽 흥미롭다. “언젠가 강도사건이 있었는데, 범인은 오스트리아 화폐만 훔쳐가고 뵈르글 화폐는 버려놓고 갔더라고요. 그러니 범인은 딴 도시 사람이 분명한 거죠. 이 도시 사람이었다면 가져갔을 테니까요.” 독일 탄광마을 슈바넨키르헨에서 발행된 자유화폐는 베라라고 부르는데, 노동자의 급료 중 3분의 2가 베라로 지급되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은 종업원용 가게에서 생필품을 베라로 구매할 수 있었고, 이윽고 마을가게로 더 확장되었다. 그러나 자유화폐는 국가의 화폐발행권을 주장하는 독일 제국은행에 의해 사용금지 명령을 받고서 저지된다. 그후 독일은 파시즘으로 향했다.

 

 

 


 미하엘 엔데는 『모모』(1970)를 쓸 무렵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검토했다. 그리고 일종의 예언자적 능력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고, 현대 금융자본주의에 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작품 속에 구현하는 것을 필생의 작업으로 삼았다. 『끝없는 이야기』(1979)를 비롯해 오페라 대본으로 쓴 <하멜른의 죽음의 춤>(1994)과 <병 속의 악마>가 그것이다. 특히 마지막 유작인 오페라 대본 <병 속의 악마>에서 악마가 든 병을 다른 사람에게 팔 때 반드시 샀을 때보다 싼값에 팔아야 한다고 설정한 것은 좋은 예가 된다. 근대 경제의 화페경제 시스템에 대해 ‘유한성’과 ‘마이너스(-)’라는 발상을 접목하고자 한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공유된 사회 공간 혹은 창조적 공유지의 형성과 강화를 위해 더 근본적인 상상과 사유 그리고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격차가 격차를 낳고, 이익이 이익을 낳는 화폐금융 시스템 문제를 외면하는 한, 자치의 문화와 자립의 경제는 더 요원할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회의 사유화 현상도 더 심화될 수 있다. 철학자 이반 일리치가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에서 “우리는 자원이 아니라 공유지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희소성을 전제로 하는 호모 오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에 의해 공동체적 삶이 주는 축복을 누릴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그의 주장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민중의 서브시스턴스(subsistence) 경제가 회복되고 사람 또한 품위와 존엄을 지닐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이 시대착오적 헛소리쯤으로 취급되는 사회는 불행하다. 그런 사회는 거대한 전환의 길에 대해 상상하고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된 사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강연에서 “남아 있는 공용(共用)을 방어하라”라고 말하는 이반 일리치의 외침이 내 귓전에 맴도는 것만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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