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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홀로 볼링'은 더 이상 없다
  • 고영직 _문학평론가
  • 2013.07.01


 

 내가 사는 양천구가 요즘 소란스럽다. 목동 행복주택지구 지정을 철회하라는 지역 주민들의 반대 여론이 높기 때문이다. 행복주택 설명회는 파행으로 끝났고, 오목교역 주변 곳곳에 행복주택지구 지정 철회를 촉구하는 현수막들이 일제히 걸렸다. 행복주택은 철도부지와 유수지를 활용해 임대주택을 지어 시세의 50~70% 수준으로 대학생, 사회초년생, 신혼부부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정부가 시행하는 사업이다. 주민들은 “사업 취지는 찬성하지만, 장소 선정을 잘못했다”고 말한다. 2800가구 규모의 행복주택이 건설되어 분양되면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과밀학급, 교통대란, 주차대란 문제가 더 심해질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업 추진에 반대한다. 그러나 주민들의 진짜 속내는 동네 이미지 상실과 집값 하락을 우려하는 마음의 습관이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도심마을 형태의 커뮤니티는 가능한가. 우리는 이른바 할리우드식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야말로 지상 최고의 유토피아라는 마음의 습관과 감정의 구조가 작동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게이티드 커뮤니티는 초고층 아파트, 타운하우스처럼 입주민 외에는 거주 구역으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없도록 울타리를 쳐놓고 살아가는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말한다. 그런 커뮤니티는 필시 우리 시대 인클로저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실제 목동 행복주택 예정지구에는 현대하이페리온을 비롯한 초고층 고급 아파트들이 밀집되어 있다. 아파트 인근 학교에 그곳에 거주하는 아이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독일 작가 크리스타 볼프가 쓴 소설 제목 『나누어진 하늘(Der geteilte Himmel)』처럼 우리는 분단된 하늘에서 살고 있다고 확언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과 문화가 두 개의 하늘로 나누어진 사회는 공유지(公有地/共有地)가 파괴된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무심한 상대주의, 정신을 좀먹는 냉소주의, 전통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경멸, 고통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을 당연시하는 감정의 구조가 작동한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에 나오는 어느 등장인물이 다음처럼 말하는 대목은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다.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를 들으며 슬픔을 교육받은 사람들이 정작 이웃집의 인간적 절망에 대해서는 눈물짓는 능력을 마비당했을지도 몰라.” 우리가 공공의 삶을 상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미국 교육자 파커 J. 파머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정치적 연합의 유대가 가능한 자유로운 공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파커 J. 파머는 미국 사회에서 공적인 삶이 쇠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런 쇠퇴의 주된 징후로서 공공도로의 상업적인 기능이 사적으로 소유된 쇼핑몰로 대체되어왔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왜 쇼핑몰화 현상이 문제인가. 오직 시장(영업)의 자유를 표방하는 쇼핑몰은 그곳에 누가 모일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걸인과 노숙인은 들어갈 수 없고, 이러한 주변화된 사람들은 시민적 공감의 망으로부터 훨씬 멀리 밀려난다. 공공연한 정치 행위도 역시 금지되는데, 그 뒤에는 법정의 지지가 있다.”(p.175) 말 그대로 공유지의 사유화(私有化)가 철저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가 일상적으로 참여할 공적인 삶의 장소와 활력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급증함에 따라 전통시장이 붕괴하고 사회적 커뮤니티가 갈수록 해체되는 우리 현실과도 오버랩된다.

 
 파커 J. 파머는 이 책에서 “민주주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무엇이다”라고 말한다. 스스로 다스림[自治]을 구현할 줄 아는 시민들의 자발성과 역능을 그토록 역설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의 최대 장점은 ‘우리가 하고 있는 무엇’에 관한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는 데 있다. 청년 시절 ‘저절로 시민이 된 사람’이었던 파커 J. 파머가 1974년 남부 조지아주 흑인공동체에서 겪은 어느 교육 경험을 통해 ‘제2의 탄생’을 했다고 술회하는 대목은 퍽 인상적이다. 그는 이 교육 경험에서 ‘깨어져 희망으로 열린 마음[broken open]’을 갖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배웠다고 말한다. 그가 로버트의 규칙이라고 소개한 수업 방식은 팽팽한 대립과 난투를 피하면서 질서정연하게 집단의 의사결정을 하도록 돕는 일련의 절차이다. 일종의 협력의 의례인 셈이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학력은 높았지만 아는 것은 별로 없던 백인 젊은이에 불과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그것은 자신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 속으로 경계를 넘어 들어가는 타자성의 경험이었다. 그때의 강렬한 교육 경험은 이 책에서 그가 낯선 사람을 환대하고, 희망이라고 불리는 마음의 습관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 책에는 시민들의 공적인 삶이 가능한 공간의 회복에 관한 다양한 사례가 등장한다. 이 중에서 도시 디자이너 마크 레이크먼의 사례는 흥미롭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어느 마을에서 진행된 마크 레이크먼의 공공 프로젝트는 근린의 핵심적 교차로들을 다시 디자인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는 시민 활동가들과 함께 교차로 지역에 벤치, 대출 도서관, 24시간 찻집, 아이들의 놀이방, 지역의 정보를 제공하는 키오스크[공공장소에 설치된 매점 등의 간이 건조물] 같은 공적 시설물을 세웠다. 그후 어떻게 변했을까? 한낱 자동차 교차로에 불과했던 장소가 지역 주민들 간에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간으로 변모했다. 교차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거주 기간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파커 J. 파머는 “아무도 머물지 않던 곳을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싶은 장소로 만드는 것”(p.184)이었다고 평가한다.


 공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공공 프로젝트는 주민의 자발적 참여는 부재하고 행․재정의 전적인 지원에 의존하는 이른바 ‘관공(官公) 프로젝트’의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크 레이크먼의 프로젝트가 당국의 허가 없이 시민들의 자체적인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이론으로 사회적 네트워크의 힘과 가치를 역설하는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D. 퍼트넘의 『나홀로 볼링』은 우리가 참조해야 하는 유의미한 텍스트가 되어야 마땅하다. 나와 내 가족이 사회적 낙오자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공포의 문화로 인해 셀프 테일러리즘(self-Taylorism)이 유례없이 강화되는 우리 현실에서 환기하는 바가 퍽 크다.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에는 연계형(포괄적)과 결속형(배타적)의 유형이 있다고 말한다. “결속형 사회적 자본은 일종의 사회학적 강력접착제 역할을 하고, 연계형 사회적 자본은 사회학적 윤활유 역할을 한다.”(p.27) 이런 관점에서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과 사회적 네트워크의 관련 양상을 정밀히 탐사하고 추적한다. 각별한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 제4부 <사회적 자본의 기능>이다. 퍼트넘은 시민들이 높은 수준의 신뢰와 시민 참여를 통해 사회적 자본을 형성할 경우, 교육과 어린이의 발전은 물론이고 안전하고 유익한 동네 형성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이른바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표현하는 죄수의 딜레마, 무임승차 문제, 공유지의 비극 같은 문제들도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사회적) 네트워크의 제도적 메커니즘에 의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낙관한다.

 

 

 

 


 물론 세상이 저절로 아름다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파울로 프레이리, 사울 D. 알린스키, 이반 일리치, 전태일 같은 공동체 조직가들의 이름을 잊어서는 안되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혼자 살다 혼자 죽는 공유지의 비극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당신을 구할 사람은 당신뿐’이라는 가치를 지상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우리 사회에는 그런 공동체 조직가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마음과 문화가 분단된 사회에는 희망 또한 없기 때문이다. 파커 J. 파머가 왜 “자유를 지탱하는 데 습관과 마음이 법보다 더 중요하다”고 역설하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 말은 법과 제도의 필요성을 간과하는 언명은 아닐 것이다.


 내가 사는 양천구에서 3년째 운영하고 있는 <책읽기 모임>을 더 활성화해야겠다. 어쩌면 일상의 네트워크는 그런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과정에서 형성되고 강화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건축가 정기용은 『사람․건축․도시』에서 “당신은 ‘대합실’에 사는가”라고 질문한다.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 것일까. 자신이 사는 집과 동네를 대합실로 취급하는 한, 나와 우리는 혼자 살다 혼자 죽는 무연사회를 용인하게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집으로 곧장 가기에는 아직 이른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나와 우리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이때 “나의 유일하고 확고한 진리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사울 D. 알린스키)라는 어느 공동체 조직가의 말은 지금 이곳에서 다시 음미되어야 한다. 우리의 자산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_ 파커 J. 파머(김찬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글항아리 2012)
_ 로버트 D. 퍼트넘(정승현) 『나홀로 볼링: 사회적 커뮤니티의 붕괴와 소생』(페이퍼로드 2009)
_ 사울 D. 알린스키(박순성․박지우)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아르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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