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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집운동> 합니다. 
  • 전지
  • 2018.10.29

25호 넘봄 

<채집운동> 합니다. 

전지

 

 





‘성격이 다큐스럽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웃어 넘길만한 이야기를 너무 진지하게 듣는다는 이야기일진대, 나는 그래도 굳이 진지하게 해석하고 싶은 고집이 있다. 

길을 걷다가도 눈이 닿는 어떤 것들에 심히 감정이입을 하거나 누가 저랬을까, 어쩌다 저래 됐을지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떼는 편이다. 그래, 마치 다큐를 찍듯이 많이 보고 기억하되 판단은 보류하고 우선 관찰한다. 

체력이 좋고 오래 걷는 걸 즐기는 나는 서울을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경사가 심한 동네와 주택이 밀집된 동네를 다니며 집과 길의 모양새를 보는데 정신 팔기를 즐겼다. 작업이든 일이든 언제나 '이번엔 서울 어디서 하지?’ 라며 생각했다.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 안양에서 서울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시흥대로를 빠져나가거나, 크고 못생긴 안양역에서 전철을 타야 하는데 그 반복이 귀찮고 지루하다고 생각될 때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서울이나, 안양이나. 

아직 서울을 다 본 건 아니지만, 그간 지나치며 흘겨 본 안양을 작정하고 보면, 과연 어떨까 싶어 가까운 안양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굳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다닐 성향도 아니고 유달리 후미진 곳을 후벼 팔 생각도 없다. 이전 같으면 뒷골목 뒷담벼락만 찾아 다녔을 테지만, 다닐 만큼 다녀봐서인지 이젠 후벼 파고들어 가기 전에도 동네엔 이미 드러나 있는 게 많았다. 

주차금지 드로잉 <애교>
 

 

동네에서 주로 관찰하는 것들은 ‘만든 사람의 성향이 보이는’것들.

부대끼며 모여있는 동네엔 정보, 공고, 메시지가 덕지덕지 넘쳤고 다닥다닥 붙어 이어지는 길엔 비공식적인 공사가 흔했다.

거칠고 손 맛있는 콘크리트, 시멘트, 아스팔트의 마감 질엔 만든이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욱해서 적었거나 급해서 써 붙인 메시지엔 감정이 줄줄 흘러내렸다. 

굳이 표현한다면 '치명적인 표현물'의 멋을 띄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채집한다.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후 집에 와서 컴퓨터에 옮겨 '요건 점토로 만들고, 요건 그리는 게 좋겠군. 이건 흑백으로, 이건 꼭 컬러를 살리는 게..' 하며 나름의 시스템으로 분류한다. 경사진 길이나 계단, 담장을 만드느라 점토에 물을 먹여 티스푼으로 철퍽철퍽 두드릴 땐 흙손의 맛이 연상됐고, 나무를 그리느라 흑연막대 H부터 6B까지 늘어놓고 마구 힘주어 그려댈 땐 마치 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 

안양엔 초등학교 1학년 때 이사 왔는데, 4년간 서울에 살다 온 걸 제외하면 26년 정도 살았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어디에 가려면 어떤 버스를 타야 하는지, 어느 골목에 가면 오래된 집이 있고, 지름길이나 걷기 좋은 산책로를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 잘 알아서 발길을 서울로 돌린 지 수년째였는데 결혼을 하고는 글쎄, 나는 또 안양에 살게 되었다. 

남편은 안양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고 이따금 내게 버스노선이나 길을 물어오면 정보를 주는 재미가 좋은 나는 능숙하게 알려주곤 했다. 그와 자전거를 타고 안양을 돌던 어느 밤, 자전거로 달리기 좋은 길로 안내하려는 내게 ‘저쪽 길이 궁금해’ 라며 호기심으로 길을 선택하는 그를 따라가던 순간부터 나는 안양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안양초행자와 다니며 내가 못 봤던 길을 발견하기도 했고, 그가 가리키는 손끝엔 내 눈엔 안 보이던 집이나 건물도 보였다. 나는 정신없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안양초행자와 산책하며 받는 충격에 재미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산책은 좀 더 유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밥은 집에서, 길은 이왕이면 지름길로, 산책하기 좋은 시간은 해지는 시간’ 이라는 보통의 룰을 깨고 움직이고 싶어졌다. 

 

 

<검은 천을 덮은 소신 있는 집> 귀갓길에 보는 집. 옥상에 비가 새는 것인지, 햇빛이 강해서인지. 비를 막기엔 구멍이 뚫려있고 햇빛을 막기엔 검은 천이다. 1층의 두 집은 복사한 것처럼 같게 생겼는데, 왼쪽 집은 늘 현관문을 열고 산다. 실용적이면서도 부분 부분에 감각이 들어간 집이다. 특히나 대문과 계단에.



 

 

<기와지붕 송림아파트> 구로디지털단지에서 버스 타고 안양으로 향할 때, 관악역 못 가서 쯤 오른편에 있는 불길 같은 나무를 보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송림아파트를 보고 지나친다. 계단 꼭대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니 글쎄, 기와지붕이다.

 

 

 

아저씨들이 우글댈 것 같은 식당에서 혼밥을 해보고, 사람이 많이 서 있는 버스 정류장 옆에 낚시 의자를 펴고 앉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뻔히 보이는 지름길을 내버려두고 돌아돌아 돌아가고, 아침에 눈 뜨자 마자 새벽같이 동네를 돌거나 야밤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 다녔다. 

가끔은 동네에 학을 떼는 날도 있었지만 이런 시도는 분명히 동네를 입체적으로 느끼게 해주었고, 나의 머리와 어깨와 손에 들어가 있던 긴장감도 풀리는 것 같았다. 

오감을 열고 보고 느낀 나의 동네는 못생기고 예쁘고 거칠고 섬세하고 오만 짬뽕 흔들어 섞어찌개 같은 곳이었지만, 이야기는 못지않게 넘쳐 흘러 여기저기서 '날 잡아잡솨'하는 것 마냥 소재들이 널려있었다. 

그래서 마구마구 잡아 채집했다. 

곧 없어질 것 같은 빈 상가, 지금의 계절에만 볼 수 있는 장소의 풍경, 가게 주인이 바뀌기 전에 그려놓아야 할 것 같은 가게, 학창시절부터 지나치며 눈도장을 수없이 찍었던 나무를 그리거나 점토로 만들었다. 출발은 안양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인 붉은벽돌주택의 우리 집을 만드는 것부터 하여, 몇 번을 마음으로 찍어둔 계단이나 골목, 상가건물, 오래된 아파트도 만들었다. 

그것, 그곳들을 기념하고 조명하는 작업을 1년간 진행하면서 내 눈은 계속 안양을 훑었고 그렇게 안양만 돌아다니고 들여다보니 만나는 이들에게도 안양 얘기를 많이 하게 됐다. 

 


 

 <단골로 만들고 싶었던 술집이 있었는데> 반듯하게 편집된 90년대 전단지 같은 인상을 준 건물이었다. 해 질 녘이 되면 건물이 노랗게 보일 만큼 목이 좋은 자리. 내 취향의 술집을 발견하고 좋았었는데, 재건축된다 하여 모두 문을 닫고 떠났다. 그렇게 서두르더니 1년이 넘게 그대로 있다.

 

 

 

<아케이드 속에 숨겨진 포부 컸던 상가> 건물주 사정과 상관없이 90년대에 멈춰버린 것 같은 상가 안의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소방법상 건물 지하에 주차장을 만들어야 해서 돈 들여 해놨더니, 전통시장화되어 아케이드 씌워지고 지하주차장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역시나 새까맣게 타는 건물주 아저씨의 사정은 모르게 나는 노점이 그대로 있어서 좋을 뿐.

 

 

이따금 누군가가 이런 작업을 하는 내게 동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라도 있느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질색 팔색을 하며 '좋아서 남겨두는 기념'이 아닌 '웃기고 슬프고 이상하고 마음이 가서 조명하고 모아놓고 싶은' 마음이라며 굳이 까다로운 설명을 할 것이다. ‘그 마음이 곧 동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아니냐며 다시 포장해온다면, 더는 할 말이 없는 나는 조용히 오글거리는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켜고는 facebook에 이렇게 글이나 쓸 것이다. ‘동네는 자신의 삶이 담긴 곳이라 특별한 마음은 들어도 사랑하게 되진 않는다. 별별 사람이 함께하는 곳이라 미운 마음 없이 각별한 것도 말이 안 되기 때문에, 한가지의 마음으로만(그러니까 사랑이나 애정으로) 정리되는 건 동네를 더더욱 납작하게 표현하는 거 아닐까? 동네를 사랑한다니! 턱과 미간에 힘을 주고 가까스로 ’아이고. 스릉흔드!’ 하면 또 모를까.’ 라고. 

 

성격이 다큐스러운 나의 주관적인 작업 <채집운동>은 특정공간과 오브제를 기념하고 조명한, 현저히 개인적 시선의 지역관찰 기록물이다. 첫 안양 편을 끝내고 또 다른 지역을 채집한 운동의 결과물이 좀 더 쌓인다면, 내가 과연 동네 어느 부분에 꽂혔었는지, 어느 방향을 겨냥했었는지 지금보다 선명히 드러날 거라 생각한다. 

아, 반드시 염두에 둘 사항은 그 과정에서 동네도 변하고 ‘나’라는 필터링도 변한다는 것.


동네쪽지 필사 <나도 몰라>













 

 

전지 

조끼를 입고 돌아다니다가 눈에 들어온 것들을 만든다. 생활과 창작을 하면서 쌓인 이야기들은 수첩에 적어 놓았다가 만화책으로 만든다. 만든 책을 판매하기 위해 앞 내지에 간략한 글을 쓰고 포장을 하고 우체국으로 갈 때, 내가 '일 다운 작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쪼가 살아있는 한, 동력이 가동되는 한, 계속 그렇게 무언가를 만들어 낼 것 같다. 만들어낸 책으로는 <단편만화수필집 끙>, <오팔하우스>, 가족구술화 엄마편 <있을재 구술옥>, 안양 드로잉 아카이브 <채집운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