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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29

25호 곁봄 
잔꾀 부릴 수 없는 모니터링
잔꾀(임상빈, 이현만, 박유미)


 

* 잔꾀는 작은 꾀가 모여 지속가능한 예술활동을 모의하고 실행하며 활로를 모색하는 팀이다. 현재 <예술교육 콘텐츠 연구개발>과 <경기 꿈다락 모니터링 운영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모니터링 위원들은 누구인가. 현장과 행정 사이를 오고가는 전령, 서류와 현장의 오차를 읽는 번역가, 드러나지 않던 것을 캐내는 발굴자, 고충을 들어주는 상담원,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자, 단체와 재단 양쪽의 입장을 대변하는 변호인,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양한 예술교육의 스타일과 철학을 맛보는 탐미자들이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의 말

 

하나의 유령이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배회하고 있다. 모니터링이라는 유령이.
굳은살처럼 감각이 무뎌진 예술교육이, 제도와 시스템이, 유행에 편승한 직업관과 타협한 계약론이,
이 유령을 붙잡아 두기 위해 가면극을 만들었다.



꿈다락 모니터링 위원이라는 활동은 이상하고 어색한 존재가 되어서 현장을 방문한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은 것처럼 구석한 자리를 차지하고서 프로그램을 지켜보는 평가자 혹은 감시자의 눈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이들은 같은 공간에 함께하지만 동참하지 않는 이방인을 만나게 된다. 낯선 어른은 주변을 배회하며 구경만 할 뿐이기에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신경 쓰이는 존재가 된다. 유령처럼. 더군다나 아이들은 예술교육이 무슨 특별한 일이라고 매번 활동사진에 찍혀야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분명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늘 그렇듯이 무심함으로 카메라와 이방인의 개입을 용인해 준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보호자의 동의 사인이 아니라 아이들이 침묵으로 허락해준 일임을. 이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시선은 우리를 따라다닌다. 우리의 문화예술교육이 실행되고 운영되는 지금 여기에 빅 브라더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모니터링과 방법론을 찾아내야 한다. 보다 인간적인 예술교육을 위해서 지금과 같은 모니터링이 사라질 수 있도록! 없어지도록! 그러나 아직 우리는 서로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믿음이 부족하다. 우리의 불신이 언제 어떻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인지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이제는 우리의 관계회복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야할지 고민해야 한다.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았다하더라도 이전의 나쁜 버릇들이 일시에 제거되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조금씩 점차적으로 닦아나갈 수밖에 없다. 현실에 적용되는 방편은 언제나 미진하게 시행된다. 전복이나 혁명은 없다. 왜 안되지라고 자문하지만, 세상은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것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된다. 제도도 사람처럼 인과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수긍하기 어렵고 비합리적인 요소들을 붙잡고 흔들어보지만 바뀌는 것은 없다. 그저 두통과 혈압에 좋은 약을 챙겨두는 일이 유일한 대처법이다.


현장에서 만나는 운영단체들 대부분은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라 행정업무에 대한 불평불만을 토로한다. 관리감독 시스템이 과도하면 예술가 그룹은 혼란 상태에 빠진다. 노동에 대한 보상의 차원에서 벗어나 일의 가치와 보람이란 자존감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균열을 일으키는 촉매제 중 하나가 간식이다. 영수증만 첨부하면 되던 일이 실물사진까지 필요해지고 이제는 먹는 상황까지 인증해야 한다. 강사들은 간식도 함께 먹을 수 없다. 오늘날 행정은 사람을 잊어가고 있다. 시스템의 변화에 따라 예술 강사들의 인식도 바뀌기 마련이다. 임금 불만의 경제적 차원에서 존재의 이유를 고민하는 철학적 문제로. 나는 얼마를 버는가에서 나는 왜 이 바닥에 머물고 있는가로. 고뇌의 근원은 더 이상 돈 몇 푼에 있지 않게 되었다. 예술 강사로써 가졌던 자긍심에 상처를 입으면 마음이 쪼그라든다. 아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주던 눈길이 소원해지고 일머리를 쓰지 않는 무기력에 빠져든다. 그리곤 힐링을 찾는다. 스스로 환자의 자리에 위치하면서 치유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약해졌다. 힐링은 문화산업이 주입한 대중감성이다. 미디어의 반복재생이 구축한 이미지를 보면서 대리만족하던 감각이 어느 순간 유사행동을 따라하도록 물들였다. 미디어는 유아적 환상단계로 돌아가려는 욕망을 부추긴다. 우리는 최면에 빠진 상태다. 돌아가야 한다. 예술가 혹은 예술 교육자는 환자가 아니라 의사의 자리로 회귀해야 한다. 그곳이 본래의 자리다.


일의 재미를 어디에서 찾아주어야 할까. 우리를 소진시키는 것 중 하나는 거대한 e나라도움 시스템이다. 업무보고식 입력절차는 현장의 활동과 궁합이 맞질 않고, 이 관계가 창의력을 생산하는데 장애가 된다고들 한다. 또 하나의 이상 현상은, 전산시스템의 적응이 어려운 나머지 노동시간은 짧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난다는 점이다. 불안정한 시스템을 강요하는 문제도 한몫한다. 복잡성과 오류는 지금도 남아있는 문제들이다. 물론 e나라도움 시스템 교육 서비스가 이뤄지고는 있으나, 이것은 함정과 비슷하다.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받아야 하는 교육시간은 강제된 조건이기에 업무의 연장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교육시간은 노동으로 불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임금에서도 제외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관리효율성의 증대를 위한 의무교육도 마땅히 노임을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이치에 맞다. 이런 대우가 없기 때문에 불평불만이 쌓이는 것이다. 이것을 지원금 정책의 보이지 않는 착취로 볼 수도 있을까. 조금 다르지만 유사한 방식이 문화예술교육사에도 적용된다. 제도의 필요에 의해 만든 정책이라면, 활동하고 있거나 활동하려는 모든 예술교육자들에게 무상교육 서비스를 진행했어야 했다. 의무화로 돌려놓고 자격증 장사를 하면서 역량부족을 빌미삼아 현장의 예술교육자들에게 덮어씌운 자격미달 낙인은 불안감과 함께 불쾌한 감정을 유발시킨다. 한편, 불안감에 휩싸인 일부 예술가들은 제도에 의존적인 노예의 씨앗을 품게 된다. 제도의 바깥 경계선을 탐사하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예술적 이상은 현실의 구조로 들어와 스스로 순응주의자가 된다. 인내심 강한 낙타가 되기를 자처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묻고 묻는 문답법이 아니라 있는 모습에서 다른 상태를 찾는 차원적 사고다. 모니터링이 단체를 위한 것이냐 제도를 위한 것이냐의 관리모드에서 벗어나 사회가 예술교육자의 자긍심을 어떻게 고취시켜줄 것이냐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좋은 단체들이 얼마나 나오느냐를 바라보기보다는 문화예술교육이라는 토양을 어떻게 건강하게 만들 것인가를 연구해야 한다. 지금의 토양은 변질되고 있다. 근래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은 생활 기록부 봉사활동 점수를 위한 맛있는 먹잇감이 되었다. 그럼에도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다. 교육단체는 스펙 쌓기 도구로 전락한 예술 활동이라도 참여자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 할 뿐만 아니라 모종의 합의를 이끌어내 보다 적극적인 유인책으로 활용한다. 사교육 입시문화가 예술 활동을 위축시키고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상황에 맞서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려는 현실적인 방책일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모니터링이 백신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백신을 접종하면 하루 이틀 좀 아프거나 미열이 나는데, 화가 나거나 어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훗날 “외부에서 침입한 항원에 저항할 수 있는 항체를 생성하여 후에 동일한 항원에 감염되었을 때 신속한 면역 반응을 나타내게” 되기를 기대한다.


*잔꾀 임상빈_체스 마니아로 체스말 디자인과 체스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 모니터링 나와서 죄송합니다 /


# 허물 수 없는 벽

내가 속한 교육예술연구팀 <잔꾀>는 작년까지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지원사업(이하 꿈다락) 의 현장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해오다 올해부터 같은 사업의 경기지역 모니터링 운영단으로 참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모니터링 일을 받아들인 것은 수익적인 부분도 있지만, 지원사업 안에서 일방적인 명령 하달 구조로 내려오는 사업방식에 대해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에서 뭔가 실현 가능한 건의를 할 수 있는 매개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모니터링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순간, 환대는커녕 나를 바라보는 강사들의 눈빛은 우리가 현장에서 모니터링 위원이 왔을 때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감시자가 된 것이다. 경계의 시선을 풀기 위해 준비했던 부가 설명도 불편의 벽을 허물 수 없었다. 우리의 관점을 떠나 재단에서 프로그램을 참관하기 위해 누군가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내가 공간에 함께하고 있는 것 자체가 누군가를 힘들게 하는 일이 되었다.


# 의도치 않은 감시와 컨설팅 역(役)

재단과 운영단체 사이에서의 모니터링 활동은 예상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모니터링의 일은
1. 프로그램 참관 이후 운영단체와 대화하고,
2. 만남 이후의 복기를 통해 글로 생각을 정리하여 단체에 전달한 후,

3. 모니터링 위원들이 모여 재단과 운영단체 사이에서 제안될 수 있는 것들을 논의하여,
4. 실행 가능 여부를 (재단의) 확인을 거쳐 도입할 수 있도록 제안, 시도하는
과정의 순환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비상식적으로 운영되는 현장을 확인하는 것 이외에는 크게 실효성이 없었다. 이런 역할이 사업 내에 필요했을 뿐, 양쪽 모두 실제로 모니터링 활동이 사업 내부에 변화를 주길 기대하지 않는 인상이었다.
의도치 않은 감시와 컨설팅 역(役) 사이의 애매한 매개자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 구석 에서 프로그램을 살펴야 현장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을까?”, “8개월간 두 번의 만남으 로 어떤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미 심의의 과정을 거쳐 기획이 끝난 단체들이 실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에 나의 관점을 어느 선까지 전달해야 할까?”, ”컨설팅의 과정은 사실 기획서를 작성하는 단계에서 선행되어야 했지 않을까?”, “왜 심의-모니터링-컨설팅의 과정이 연결될 수 없을까?”, “꿈다락의 취지는 어디로 가고 비슷한 체험 프로그램들만 남았을까?”, “현재의 합당하지 못한 인건비 안에서 꿈다락의 취지는 수용되기 어려운 무리한 잣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로 질문이 현장에서 구조로 향했다. 얄팍한 컨설팅으로 나아지길 기대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발생하고 있는 현장의 문제는 이미 정해져 있는 심의와 지원방식 안에서 예견된 일이었다.


# 힘들게 변화하는 것들 사이에서
 

설계자는 꿈다락의 취지에 어울리는 환경을 만들어가기보다는 사실, 보급형의 안정된 구조를 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프로그램들이 자리를 채웠다.
그렇게 처음의 취지는 모호해지고 프로그램 각각의 고유성은 사라진 채,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지원사업만이 남았다.


어떤 대상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에 대한 집중력을 잃기 시작한다. 지금의 꿈다락을 향하는 시선들이 그런 상태에 멈춘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시기 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다양한 형태(간담회, 웹진, 비평 등)로 현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지원사업을 비롯한 문화예술교육 사업의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공유되어 왔다. 하지만 그로 인한 변화의 움직임은 문제의 몸통을 건드리지 못한 채 주변만 살살 긁고 있다. 기존의 지원방식과 예술교육 현장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시도해 볼 법한 여러 논의, 분석으로부터의 제안들은 사업의 설계자에게 닿지 못하고 공중으로 휘발되거나 사업 내부에 필요한 텍스트를 형식적으로 채우는 선에서 낭비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판에 연결된 관계자들은 결국 명확히 지목될 수 없는 설계자를 탓하는 것에 머무는 끝없는 반복을 한계로 받아들이며 지쳐가거나 버티지 못하고 떠나간다. ‘곁봄’ 파트의 이번 호 주제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문화예 술교육 현장의 다양한 관계자들이) 해보고 있는 것들’은 이런 무기력함을 탈피해보려는 고민으로부터 발생한 내용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런데 주제의 내용을 접하고 이상한 기분이 밀려왔다. 필자의 주제에 대한 폭넓은 해석을 기대했던 요청과 나의 태도는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삐딱한 내 마음대로 듣기엔 더 나은 품질의 하드웨어는 더 이상 지원이 어려우니 우리 함께 소프트웨어라도 업그레이드 해보는 방향으로 우회해볼까 하는 투로 들렸기 때문이다. 구조는 그대로라는 한계를 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답답함이랄까? 힘겨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생각의 경로를 우회해볼 필요도 있을 테지만, 한계가 있는 접근이라면 결국엔 본체를 건드려야 하지 않을까? 바뀌면 크게 개선될 수 있는 문제들은 고착상태에 있으니 뱃머리를 돌려야 할까? 하드웨어가 받쳐 주지 않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자발적인 소프트웨어 연구는 어쩌면 이 사업과 관계한 사람들에게 제안(사실 강요)되어선 안 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이 판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자꾸 뭔가를 탓하기만 되는 듯한 소극적인 몸짓으로 보이더라도 힘들게, 더디게 변화되는 것들의 사이에서 좀 더 버텨내야 하지 않을까?


*잔꾀 이현만_때로는 혼자, 때로는 함께하는 작업과 예술교육 사이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SELF-MONITORING
 

학교나 문화재단에 한시적으로 계약되어 ‘문화예술교육자’ 역할을 맡은 지 햇수로 7년이 지났다. 교수자 중심의 일방향식 교육이 아닌, 예술을 매개로 하는 두 주체의 사회적 상호 작용에 관심이 있던 터라 조심스럽지만, 흔쾌히 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올해는 내가 속한 교육예술연구단체 <잔꾀>가 경기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사업의 모니터링단이 되면서 활동의 범주도 확장되었다. 하지만 몇 달 후면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업데이트된 공모 사업을 들여다보며 내 자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나의 경력과 참여자와의 관계는 내면적으로 연속성과 의미를 쌓아가지만 공모 중심의 제도로 진입하면 짧게는 4시간에서 길게는 8개월 단위로 초기화된다.


모니터링 위원으로 단체를 만나거나 현장을 방문할 때 가장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점은 감시자나 평가자가 아닌 동료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 상식적인 태도는 모니터링 위원이 되자마자 즉각적으로 수용된 몸의 반응이자 단체에게 건네는 메시지로 작용했다.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강사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예술교육활동의 경험은 수평적이고 탈중심적 관계 맺음이 좋은 프로그램이나 개인별 성취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거듭 일깨워 주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모니터링은 어떠한 관계 안에서 작용하고 있을까? 유감스럽지만 모니 터링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은 단체와 모니터링 위원, 재단의 상호 순환적 관계를 위한 필요 라기보다 모니터링 위원이 단체를 대상으로 하는 비생산적인 행정 업무로 강화된 듯하다. 심의와 모니터링의 이원화된 구조도 사업의 내용과 절차의 연속성을 저해하며 모니터링의 의미와 역할을 제한하고 있다. 이대로 괜찮은가?


지금처럼 단기 용역의 형식으로 소비되어 제한적인 역할만 하는 모니터링은 필요악이다. 하지만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사업에 대한 메타 비평과 자체 모니터링으로 그 기능을 확대하며 연속성을 갖는다면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모니터링은 단체의 조력자 역할을 위해 존재하기도 하지만 모니터링 위원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현장감을 잃지 않기 위한 자가 연수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심의 위원이나 모니터링 위원은 제도적 권위에 부합하는 전문가로 구성되지만 그들의 판단과 안목이 언제나 순기능만을 하지는 않는다. 현장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자기 점검은 전문성 강화에 빠질 수 없는 요인이다.


문화예술교육은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추구한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사람, 관계, 태도는 그 빛에 가려지곤 한다. 지금의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을 비추고 있을까?

 

*잔꾀 박유미_다양한 지역에서 노년 여성들의 새로운 사회적 언어와 이미지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