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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이후를 상상할 수 있을까?
  • 강지윤
  • 2019.06.27

26호 곁봄 

우리가 이후를 상상할 수 있을까?

강지윤


 

0.

일 년에 한두 번쯤, 굉장한 불안감에 시달릴 때가 있다. 그 불안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아주 자주 오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12월쯤, 휘몰아칠 때는 몇 달 동안 지속되고, 나는 그 속에서 아주 우울한 상태에 머물다가 4월쯤 빠져나온다. 왜 4월이고, 12월인지는 다들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불안감은 하고자 하는 일들을 지속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짧게는 당장 올해, 아니면 일 년 후, 오 년 후, 십 년 후를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들, 물론 작업을 포함하여 그 외에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여러 일들이 있다. 쓸데없는 고집인지는 몰라도 예술과 관련된 일들을 하려고 한다. 그 중 하나는 예술교육으로, 작가가 작업과 병행하며 이 일을 하는 것은 꽤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필연적인 이유나 이상적인 지향점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교육 활동이 비자발적인 선택이라고 ―그러니까 지나치게 편하게 말하자면 돈벌이 수단이라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고, 그 때문에 나는 늘 조금의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이런 마음으로 교육 활동에 임하거나, 예술교육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이 있을까?

 

예술교육이 나에게는 부차적인 활동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자꾸만 계산 해보게 된다. 나의 작업에 한 톨만큼 도움이 되는가? 나의 삶을 확장시키거나 연장시킬 수 있는가? 나를 벌어 먹일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교육자’라는 입장에서 껄끄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이 질문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나는 빙빙 겉도는 이야기만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채감을 조금 내려놓고, 겸업 예술교육자로서 이 일을 지속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어떤 이후를 상상했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는 나처럼 예술가와 예술교육자 중간에 걸쳐있는 포지션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틀에 갇히지 않는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기대하며, 교육 쪽으로 깊이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을 원하는 셈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현장의 시스템이 이런 새로움을 확장할 수 있게, 적어도 유지할 수 있게 놔두지는 않는다. 

 

내가 처음 문화예술교육이라고 불릴만한 경험을 한 것은 금천예술공장에 입주작가로 있을 때 예술가 워크숍을 통해서였다. 그 때의 워크숍은 보다 작업에 가까웠다. 학교 관계자와 아이들은 그럴싸한 문서 없이도 우리를 신뢰했고(그보다는 공기관의 이름을 신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존중했으며, 우리 역시 교육을 한다기보다는 참여자들과 함께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경험을 시작으로 보다 많은 문화예술교육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지금은 오히려 보수적이 되었다. 늘 새로운 기관과 참여자들에게 나 자신을, 그리고 콘텐츠의 효과를 끊임없이 증명하고 문서화해야 하는 일은 사람을 방어적이게 만든다. 예술교육은 일종의 서비스로 제공되며 따라서 예술가의 교육 콘텐츠는 예술가가 아닌 참여자들을 중심으로 재편성되고 일반화된다. 특히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할 때에는 내가 예술가인지 레크레이션 강사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 나는 쓸데없이 많은 농담을 던져야 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지만, 참여자들이 예술가의 공간―레지던시나 미술관, 작업실로 오느냐 혹은 예술가가 학교나 기관으로 방문하느냐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문제일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경우 예술가들은 참여자들의 공간을 방문하여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고, 손님, 이벤트 제공자, 뜨내기의 위치에 서게 된다. 우리는 예술가의 입지를 곧잘 잃는다.

 

이런 상황들을 반복해서 겪으면서, 교육은 작업과는 점차 무관해지고 서비스하기 좋게 일반화된 형태로 다듬어진다. 활동이 한 회차 마무리 될 때, 예술가는 +1의 경험치를 받는 것이 아니다. 교육 콘텐츠는 확장되기보다는 위축되고, 작업과 유사한 뉘앙스만 가진 채 자신으로부터 탈각된다. 

 

2.

반대로 생각해보자. 만약 예술가가 작업과 교육을 가깝게 유지하며 계속해서 상호 교환과 자기 성장을 일궈낼 수 있다면 지속을 위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현장과 행정 시스템을 어떻게 설정하는지가 외부적인 상황이라면, 예술가들이 교육 콘텐츠를 어떻게 설계할지는 내부적인 요인이다. 

그동안 교육 활동을 단단하게 뒷받침 해줘야 하는 사전·사후 활동들이 지나치게 생략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가들은 자기 작업을 어떤 방식으로 번역할지, 그렇게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참여자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충분히 실험해 볼 시간이 부족하다. 현장을 읽어주는 사람도 없다. 비평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불러일으키기 힘들고, 의미를 생산해 낼 수 없으니 그것은 다시금 자기―작업화 되지 않는다. 그래서 만들어진 콘텐츠는 일회성 서비스로만 제공되어 휘발되고, 순환되기를 멈춘다. 

 

그래도 올해는 다른 해와는 달리 나름의 실험을 해보고 있다. 나는 예술인복지재단에서 하는 예술인파견지원사업의 기획사업 트랙에서 6명의 시각·무용 예술가들과 함께 예술가 워크숍 콘텐츠를 연구·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멋있게 말해서 연구·개발이지, 실제로는 예술가들끼리 직접 시연해보고 깔깔대고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나 생각보다 좋은 점들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우리는 6개월 동안 자신의 작업을 중심에 놓고 참여자들의 이해를 돕는 다양한 소스를 워크숍의 형태로 풀어내는 것을 목표로, 작업과 교육을 최대한 넓고 깊게 밀착해 볼 것이다.

특히 내가 참여자가 되어서 나 뿐 아니라 다른 예술가의 프로그램을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이는 남들에게 맡겨 놓았던 평가와 신뢰를 스스로 회복하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서로의 교육을 곁에서 읽어주는 해설자, 관람자와 참여자가 되어 서로 배움의 관계를 안에서부터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그런데 물론 이런 활동들은 공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문화예술교육지원 사업이 사전 연구와 개발, 사후 비평과 보완을 할 수 있게끔 탄탄한 조직과 관계를 만드는 것에 더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예술가, 예술교육자들을 지역별로 혹은 장르별로 묶어 네트워킹 파티 뭐 이런 것을 한다고 하면 나는 너무 슬플 것 같다.)

 

3. 

그 외에, 이후를 상상하기 위해 스스로도 여전히 고민하는 질문들을 던져본다. 예를 들면, ‘문화예술교육을 참여자들에게 무료로 서비스하는 것은 온당한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시민들이 문화예술을 이해하는 경험을 위해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의사를 기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이 떠오른 것은 양질의 문화예술교육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공익적 목표가 장기적으로 예술가, 예술교육자들이 기금에 얽매이게 하는 장치가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들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교육 콘텐츠로 자생 할 수 있는 기회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시민들에게는 문화예술교육이 너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시간과 장소만 맞으면 왔다가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금방이라도 돌아설 수 있는 그 정도의 편의성. 

그래서 어쩌면, 사전·사후 단계의 지원을 강화하여 완성도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시민들이 일정 수준의 참가비를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 결국 예술교육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예술가들의 자생력을 기르는 토대가 되지 않을까? 나아가 이제는 수많은 예술 교육자들로 포화상태인 꿈다락이나 지특, 방과후학교 등 예술교육 지원사업에서 기존 예술가들을 졸업시키고 자립해 나아가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하는 시점은 아닐까? 

 

근본적으로 공공기금 선정 당락에 예술가의 일 년이 크게 흔들리는 상황들, 그나마도 한 해의 계획만 세울 수 있을 뿐 당장 내년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약속하지 못하는 상황들은 예술가들이 지금 너머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올해 서울문화재단 지원사업 심사와 발표가 한 달 넘게 지연되면서 많은 수의 예술가들이 한 해 계획을 모조리 지연시켜야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이 생태계의 비정상적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더 끔찍한 것은 우리들이 늙었을 때를 상상해보는 것인데, 그것을 생각하면 더 이상 상상력이 나아갈 길이 없다. 우리에게 과연 이후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예술가, 예술교육자, 기획자일 수 있는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과 의지, 노력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언제까지 기금에 의존해 활동을 지속해야 하는가(혹은 할 수 있는가)? 자생적인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가? 그를 위해 예술가와 지원조직이 어떻게 공조해야 하는가? 아직은 질문밖에 없는 단계지만 이런 답 없는 질문들이 오가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

 

4.

어쩌면, ‘예술교육 활동의 정리 및 확장’이라는 본 원고의 주제에 비해 내가 지나치게 멀리 나아간 걸 수도 있다. 약간 후회가 된다.

 

그러나 교육이 작업과 점점 멀어지고, 짧게는 내년, 길게는 십 년 후의 계획이 불가능하며, 주변에서 적절한 모델을 찾을 수도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런 말들 없이 나아갈 길을 말하기란 막막하기만 했다. 문제점을 알고도 꾸역꾸역 교육 활동을 계속해왔고, 올해도 마찬가지이지만, 만약 어떤 전환점이 없다면 나도 조만간 다른 대안을 찾아 나가떨어질 것이다. 한 개인이 탈락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새로 유입되는 예술가들은 언제나 많을 테고, 그렇게 누군가를 누군가로 대체하면서 유지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경험이 축적되지 못하는 세계는 얄팍해질 수밖에 없다.

  

 

 

 

강지윤

시각예술 작업을 하면서 여러 일들을 한다. 문화예술교육은 그 중에 하나. 교육을 기획하거나 이끄는 것, 관찰하는 일을 간간이 했다. 그렇다고 능숙해지지는 않는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항상 어렵고 서툴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