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문화 재단
  •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이미지입니다.
  • 넘봄
  • 예술과 활동의 너머에서 _이치무라 미사코
  • 유선
  • 2019.11.26

27호 넘봄
예술과 활동의 너머에서 ― 이치무라 미사코

유선


어금니에 깊고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을 때, 치료가 불가능해 어떤 방법으로도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이 입 안에 있는 것 같을 때, 매일 아침 눈을 떠 움직이고 있는 것이 나 아닌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때, 세상 사람들 모두가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며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지 혼란스러워질 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서서히 가라앉는 것처럼 느껴질 때, 다행스럽게도 나침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어디에 서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게 별처럼 비춰주는 사람들. 세상의 논리에서 이탈하고도 잘 사는 사람들. 그래서 해석이 불가능한 사람들. 다른 방향으로 세계와 본인을 바꾸기 위해 전념하는 사람들. 전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저절로 생각나는 얼굴들. 이번 인터뷰에서는 동시대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 힘을 주는, 예술가이자 활동가 이치무라 미사코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섣부른 질문이나 해석보다는 최대한 이야기를 듣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유선 / 한국에도 웹진 <일다> 등을 통해 칼럼이 소개되었고, 책도 번역된 바 있지만 그래도 이치무라씨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소개를 먼저 부탁드려요. 이번 인터뷰는 이치무라씨가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목적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창작과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특히 문화예술이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이치무라 / 글쎄요. 소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일단 저는 2003년부터 도쿄의 한 공원 블루텐트마을에서 노숙을 하며 살고 있어요.(*이하 텐트마을) 한국과는 다르게 일본에서는 공원에서 파란색 비닐 시트로 텐트를 짓고 사는 노숙인들이 많아요. 마을처럼 커뮤니티가 형성이 되어있는 곳도 꽤 있고요. 2003년에 이곳은 300명 이상이 살고 있는 커다란 커뮤니티였어요. 레스토랑이나 이발소처럼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도 많았고요. 처음 이곳을 와서 저는 친구인 O씨와 함께 여기에서 “그림이 있는 생활(絵のある生活 에노아루 세이카츠)”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생각을 했어요. 친구는 카페를 만들고 싶다고 했고요. “그럼 그림이 있는(絵のある 에노아루) 카페를 하자!”고 해서 에노아루 카페가 생겼어요. 혹시 일본에서 르누아르 카페에 가본 적이 있으신가요?

 

유선 / 도쿄에서 언젠가 담배 피울 곳이 없어서 들어가 본 적이 있어요. 정말 비싸던데요.

 

이치무라 / 맞아요. 르누아르 카페는 일본 여기저기에 있는 고급 카페의 전형 같은 것이죠. 체인점이지만 정장을 입은 분들이 서빙을 해주고 커피 한 잔에 아마 6―7천원 정도 할 거예요. 이름을 어디에서 따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프랑스 느낌이죠. 에노아루 카페라고 하면 일단 르누아르 카페를 떠올리게 되어 있어요. 하하. 우리는 공원에서 그림 그리는 모임을 하고 거기에서 그린 그림을 나무에 걸어 전시를 했어요. 그리고 카페를 차렸죠. 그림이 정말로 있는(에노아루) 카페! 그걸 2003년 10월쯤 시작했어요. 그렇게 공원에서 살기 시작했고요.

 텐트마을에서는 돈을 많이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어요. 다들 이런저런 물건을 주워 와서 살죠. 저는 그런 생활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도시에서 남아 버려지는 물건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죠. 무언가를 끊임없이 구매하는 방식이 아니어도 도시에서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돈을 내지 않고 버려진 물건을 주워오거나 남는 물건을 가져와 물물교환을 해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시스템을 에노아루 카페에서 만들었어요. 정말 다양한 물건들의 교환이 이루어졌어요.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지만 마시지 않아 집에 남아있던 인스턴트 커피와 설탕 세트를 가져와서 커피로 교환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유선 /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가요?

 

이치무라 / 예전보다는 규모가 줄었지만 비정기적으로 계속 열리고 있어요. 텐트마을에는 “노라” 라는 여성 노숙인이 모이는 장소가 있고요, 조금 떨어진 곳에 에노아루 카페라는 다른 공간도 있고요. 노라는 여성 노숙인이나 트렌스젠더  노숙인과 함께 차를 마시는 곳이에요. 야외 부엌은 공동으로 쓰고 있고요. 몇 명의 홈리스 여성들이 모이는 일이 생기면 꼭 이곳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죠. 모여서 차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하며 정보를 교환해요.


노라는 2007년에 시작했어요. 여성이 노숙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남성에 비해 너무 어렵거든요. 홈리스 중에는 남성이 훨씬 많고, 그래서 남성을 위한 지원도 훨씬 많고요. 저는 노숙을 하는 여성으로서, 내가 어떻게 노숙을 하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와 모임이 꼭 필요했어요.


홈리스들의 네트워크 안에서는 언제나 물물교환이 일어나죠. 그런데 여성들은 거기에 들어가기 쉽지 않아요. 거리에서도 늘 노숙한다는 사실을 숨기며 살아야 하죠. 저는 네트워크에 들어가 있는 편이라 사는데 필요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지만, 혼자인 여성 홈리스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아요. 비가 오면 비를 피할 곳이 필요하고, 겨울에 바람이 너무 차면 좀 몸을 녹인 곳이 필요한데 그럴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모르거나 알아도 행동하기 어려울 경우, 언제나 돈이 필요하게 되죠. 24시간 운영하는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쉬려고 해도 돈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해도 홈리스인 것을 늘 숨겨야 해요. 홈리스라고 당당하게 밝히면서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거든요. 어쨌든 현실적으로는 노숙을 한다고 해도 돈이 조금씩은 꼭 필요한데, 돈을 벌기는 아주 어려운 것이죠.

그래서 여성 홈리스들이 모여서 조금이라도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도시에서, 돈의 시스템 안에서는 일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끼리 뭔가 모여서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대안생리대를 바느질해서 팔기 시작했어요.

 

유선 / 돈의 시스템이라면?

 

이치무라 / 예를 들어 일을 하려면 주소가 필요하죠. 이력서를 써서 그걸 제출해야 하고요. 물건을 만들어 팔 때도 뭔가 자격이 필요하죠. 아니면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물건, 팔릴 만한 물건을 팔아야 한다는 통념이 있죠. 그리고 팔릴 만한 물건이라는 것의 레벨은 아주 높은 것이고. 그 기준 안에 어떻게 들어갈까 하는 것이 항상 문제가 되는데요. 거기서 벗어나는 게 아주 어렵겠지만, 그래도 옆에서 살짝 빠져나와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노숙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 팔리지 않을 것 같은 물건을 만들어서 팔아본다.

 

유선 / 작년에 오사카의 C라는 인포숍에서 노라의 대안생리대를 산 적이 있어요.

 

이치무라 / 앗! 요 몇 년 간 거기에는 물건을 보낸 적이 없는데요?!

 

유선 / 아주 오래되어 보였어요. 하하.

 

이치무라 / 대안생리대에는 4종류가 있었어요. 도깨비, 인형, 새… 아이디어는 제가 냈지만, 여러 명이 토론을 해서 누가 뭘 만들지 정했죠. 샘플이 있기는 하지만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많이 달라지곤 했어요. 각자의 작품이니 각자가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게 되어 있죠. 아예 다른 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죠. 만든 작품들은 공정무역 가게에 입점하기도 하고, 아는 가게에 입점하기도 했었어요. 누가 어디에 들여놓았는지 모르게 가게에 들어가있는 경우도 있었고요. 가끔은 만든 사람이 자기 작품이 어떻게 팔리는지 몰래 가서 지켜보기도 했어요. 자기가 만든 물건이 팔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기쁜 일이죠. 제가 홈리스 여성이나 페미니즘에 대해 발표하는 일이 생기면, 대안생리대를 만든 사람들과 함께 가서 발표하는 옆에서 팔기도 했고요.


대안생리대를 판매하는 것은 7-8년 정도 그렇게 하다가 요즘에는 좀 뜸하게 하고 있어요. 재고가 있으니 주문이 들어오면 팔기는 하지만요.

 

유선 / 텐트마을의 규모가 크게 줄어든 것도, 활동이 뜸해진 이유일까요? (*해당 공원 블루텐트마을의 텐트는 2003년 300동에서 현재 30동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치무라 / 아무래도 그렇죠. 2003년에서 2007년까지는 300동의 텐트가 있었고, 티파티를 열면 홈리스 여성들이 15명 정도는 모였었어요. 텐트마을 안에 살던 분들이 15명 이상 계셨었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죠. 갑자기 이유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쉘터에 들어가신 분들도 계시고요. 인형 패턴 생리대를 바느질 하던 분이 사라지시면 그 작품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는 식이었죠. 그렇다고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지는 않았어요. 과거에 비해 지금은 노숙에 대한 배제가 정말 심해졌거든요. 노숙을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아주 어려워졌어요. 


노라에는 노숙을 하는 분들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집을 나가고 싶지만 나가지 못하는 여성들도 참여하고 있었어요. 집에서 살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집이 없는 상태랄까요. 홈리스 상태인 사람들의 모임이었죠. 그런 사람들이 집의 시스템을, 가부장제를 비판하거나 힘든 점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었죠. 노라에 오면 집이 없고, 갈 데가 없는 가난한 여성도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고, 어디선가 구해온 맛있는 것을 나눠먹을 수 있고, 헌옷을 나눠 입을 수도 있었죠.


그런데 요즘은 텐트마을 안에서가 아니라, 도심의 거리에서 홈리스 여성들을 만날 때가 더 많아요. 노라까지 오기 힘든 사람들도 많아서, 빌딩과 빌딩 사이의 쉬거나 잘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가 거기 있는 여성들에게 말을 걸죠. 남는 물건이 있으니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한다든지. 그리고 노숙인 무료 급식에 가고 싶어도 너무 남성들만 있어 갈 수 없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럴 때는 노라에 남는 여성용 옷이 많으니 무료급식 때 나눠주자고 제안하거나, 홈리스 여성에게 말을 거는 활동가는 꼭 여성이었으면 한다는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유선 / 에노아루 카페를 만들 때, 그림이 있는 생활을 텐트마을에 만들고 싶었다고 하셨는데 그림이 왜 이곳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나요?

 

이치무라 / 지금보다 2003년에는 텐트마을의 규모가 아주 컸어요. 다들 도심의 거리에 나가 쓰레기를 뒤져서 쓸모 있는 것을 찾아 마을로 가지고 왔었죠. 텐트마을에는 항상 물건이 아주 많았어요. 소유 관계가 불분명한 물건들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기도 했고 아무데나 쌓여있기도 했죠. 마을 안에서는 물건이 이상하게 쓰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어요. 컵이 갑자기 테이블 다리가 되어 있다든지. 주워 온 물건으로 이상한 것들을 만드는 분들도 많았어요. 물건들이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걸 볼 수 있어서 아주 재미있었어요. 그런 걸 보면서 물건에 색을 칠하거나 선을 그린다거나, 아니면 아예 그림을 그려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물건은 어떤 쓰임이 있는 것이지만, 그림은 그냥 보는 거잖아요. 그냥 멍하니 보고 있는 것. 볼 시간이 필요한 것. 텐트마을 사람들은 다들 시간이 많으니까. 익숙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걸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림이 생활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생활하는데 필요하다 필요하지 않다가 아니라, 그냥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같은 것이고 그런 감수성이 충분히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여기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 다 같이 그리고 싶다, 그러면 재미있겠다 생각했어요.

 

유선 / 지금도 주변 사람들과 같이 그림을 그리시나요?

 

이치무라 / 커뮤니티가 작아지고, 그림을 그릴 기회는 예전보다 적어졌어요. 그것보다 지금은 도시에서 배제가 일어나고 있는 현장에 다 같이 가서 플랭카드를 그리죠. 하하. 주워 온 박스에 그림을 그린다든지, 행동을 위한 작품을 만들어 도시에서 주로 전시를 합니다.


올해 3월에는 미야시타 공원에서 강제 철거를 당해서 살 곳이 없어진 홈리스들과 전시를 했어요. 주워 온 박스로 자신의 몸을 아바타처럼 만들어 공원 펜스에 걸쳐놓는 작품이었죠. 그날이 강제철거 2주년이었는데요, 펜스 안에서는 도쿄올림픽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18층짜리 호텔과 5층짜리 쇼핑몰을 짓는 중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드나들던 공원을 없애고요. 완공되면 미야시타 공원은 빌딩 옥상에 다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해요.


미야시타 공원에서 쫓겨난 분들은 올림픽을 이유로 다른 공원에서도 쫓겨난 적이 있는 분들이라 더 분한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워크숍에서는 본인들이 가져온 박스를 본인의 몸이랑 똑같은 크기로 잘라서 그 안에 하고 싶은 말을 썼죠. 언젠가 우리가 이곳을 되찾을 것이다! 라고 쓴 분도 계셨고요. 본인의 아바타가 펜스를 넘어가는 느낌으로 만들었어요. 이 장소를 꼭 되찾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유선 / 저는 중증발달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진(zine) 만드는 수업을 하고 있는데요, 이름은 수업이지만 교육이라고 부르기가 아주 애매해고, 최대한 교육이 되려고 하지 않는 방식으로 옆에서 같이 그리거나 쓰는 걸 해왔어요. 학생 중에는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창작할 수 있는 시간을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요. 수업을 시작한 지 올해 4년이 되었는데, 가능한 한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시간과 도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을 만들고 있거든요. 그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생분들과 집회에 나가면 바닥에 스프레이로 그래피티도 잘 하시고, 하하. 과거에 비해 뭔가 할 수 있는 것, 해도 되는 것의 범위가 넓어졌다는 느낌을 받아요. 학생들뿐만 아니라 저도요. 물론 예술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의 영향만은 아니겠지만요. 이분들은 그 사이에 자립도 하시고, 집회도 많이 나가고, 인생의 다른 경험을 많이 하셨거든요. 저도 그분들과 만나면서 그랬고요. 혹시 텐트마을분들과 그림을 그리고 워크숍을 하거나 전시를 하면서 어떠셨나요?

 

이치무라 / 텐트마을에서도 지금까지 그림을 전혀 그려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나도 좀 그려볼까? 하고 그리기 시작한 경우가 많아요. 저도 특별히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은 아니라서, 제 그림을 보고 “저 정도면 나도 그리겠다” 하고 시작하는 분들도 많았고요. 말수가 적은 분인데, 그림으로 표현을 하면 아주 개성적인 표현이 나온다든지, 다른 사람들과 그림을 보며 서로 반응을 한다든지, 언어가 아닌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 그림이 기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그림을 그리거나 뭔가를 만들 때 자신 안에서 다른 감각을 찾게 되고, 그게 사람을 좀 더 개방적으로 만든달까요.

 

유선 / 원래 판화를 하셨잖아요? 이번 아이치 트리엔날레 <표현의 부자유전> 포스터도 만드셨죠.

 

이치무라 / 판화는 아주 오래전에 학생일 때부터 했어요. 저는 아카데믹한 예술 교육을 오래 받았어요. 판화를 공부했지만, 대학원 졸업 후 그만두었었죠. 판화의 세계라는 것은 아주 좁았거든요. 물론 예술 교육의 씬에 들어가 가르치는 일도 했었는데요. 작품도 계속 만들면서, 전시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면서…. 작품을 만드는 것과 일하는 것이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일은 일이라서, 해야만 하는 것들이 딱 정해져있으니까요. 예술을 가르치면서도, 예술을 가르치는 일이라는 것이 저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계속 가르치기는 했었는데, 결국 몸이 많이 망가졌어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주변 친구들이 거의 다 그랬었어요. 몸이 망가지거나 정신이 망가지는 방식으로 예술 교육이라는 일을 하고 있었죠. 예술 교육뿐만 아니라 다른 일을 하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죠. 살기 위해서 일을 하고 있지만, 반대로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수명이 줄어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뭔가 방법이 없을까? 라고 생각했을 때 텐트마을을 만나게 되었죠.

 

유선 / 텐트마을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죠?

 

이치무라 / 친구가 먼저 이곳을 발견했고요. 어느날 전화를 해서 “여기에다가 텐트를 세워볼까 해요” 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곳이 있구나 싶어서 한번 보러 갔었죠. 그런데 300―400명이 사는 마을이어서 절대로 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계속 해서 걸어 다녔지만, 결국에는 찾을 수가 없었는데 대신 마을 자체에 놀라게 되었죠. 여기에 여자도 살고 있는 걸까? 나도 살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며 계속 걸었어요. 

그 친구가 저에게 전화를 해서 텐트를 친다고 이야기했던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저는 텐트마을에 오기 전부터 텐트를 치는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도심이나 산, 아니면 집 안에서 갑자기 텐트를 치고 다른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서 생활을 시작하는 작업이었죠. 갤러리나 미술관 안에 텐트를 쳤던 적도 있어요. 2000년대 초반쯤이었던 것 같네요. 텐트마을에 처음 텐트를 쳤던 친구도 제 전시를 보러 왔다가 저와 친구가 되었죠. 

 

유선 / 왜 텐트였을까요?

 

이치무라 / 그러게 말예요. 처음에는 여행으로 시작했는데요, 생활 속에서 여행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살아봤어요. 그러다 텐트와 같이 문을 열고 나왔다는 느낌이랄까요. 일상으로부터 빠져나온다는 것, 여행하고 있지만 생활을 하고 있고…. 일상적인 풍경을 갑자기 끊고 여행을 가지고 온다는 것.

친구의 연락 이후 텐트마을에서 살 수 있을지 없을지를 3개월 정도 가늠해보다가, 텐트마을 안에서 사람들과 작업을 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들어와서 살게 되었네요. 

 

유선 / 그 이후로 공원에서 쭉 생활을 하셨던 건가요?

 

이치무라 / 그렇죠. 텐트를 들고 이사를 하기는 했지만요.

아, 그리고 시부야 역 다리 밑에서 10개월 정도 살았던 적이 있어요. 처음에는 그곳에서 노숙인 철거와 화재가 있었어요.

 
부야 구가 어떤 아트스쿨과 함께 역 근처에 벽화를 그리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했었거든요. 벽이 쭉 있고 안쪽으로 도보 터널이 있는 자리였는데, 벽화를 그릴 때는 거기서 주무시는 분들께 조금만 이동해달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하더니, 그림이 완성되니까 그림이 안보인다고 거기 살던 사람들을 전부 다 쫓아내더군요. 터널 안에는 상자로 만든 집이 아주 많았는데, 어느 날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재가 일어났어요.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상자 집에 살던 사람들이 겁에 질려 쫓겨나듯이 터널에서도 떠나게 되었죠.


화재가 크게 나면서 지면과 파스텔 컬러의 벽화가 몽땅 다 탔어요. 아주 새카맣게. 소방서에서 와서 청소를 해주긴 했지만, 까맣게 된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남아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자켓에 커다란 별똥별 모양 패치워크를 하고 그 까맣게 탄 벽 앞에서 자는 퍼포먼스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럼 별똥별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하. 그리고 정말 매일매일 거기에서 자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블로그에 글을 썼죠. “자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자다가 쫓겨났던 사람들이 다시 잘 수 있는 공간을 찾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냥 그 자켓 하나만 입고 매일매일 거기에서 잤어요. 그때가 한겨울이었는데요.

 

유선 / 춥지 않으셨어요? 사진의 자켓이 너무 얇아보이는데?

 

이치무라 / 정말 너무너무 추워서 새벽 2―3시가 되면 아주 몸이 덜덜 떨려 누워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죠. 상점가로 나가서 걷고 있다 문득 주위를 보면, 쫓겨난 홈리스분들이 다 같이 걷고 있었어요. 추워서 다들 걸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자고 있지? 하고 주위를 잘 살펴보니 다들 박스 집 안에 들어가서 주무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박스를 구해서 안에 들어가서 자기 시작했는데, 취객이나 10대들이 와서 와서 발로 박스 집을 차고 달아나는 일이 있었어요. 근처에서 주무시는 아저씨가 발이나 얼굴을 하나라도 내놓고 자야 공격을 덜 당한다고 알려주시더군요. 인간의 형체가 그나마 드러나면 두 번 찰 거 한 번만 찬다고. 그런데 저는 여성이잖아요? 얼굴을 드러내면 더 공격의 대상이 되죠.


그런데 몇 명이 모여서 자면 좀 테러를 당하는 일이 적었어요. 혼자 자는 것보다는요. 시부야에서는 박스로 집을 만들어 자는 것을 보고 ‘로켓’이라고 해요. “오늘 네 로켓은 못생겼다.”, “오늘 잘 갈 수 있겠어?” 하고 캄캄한 밤을 서로 잘 날아 가보자고 이야기를 하죠.

저도 습격을 당하고 기분이 안좋았는데…. 로켓 이야기를 듣고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로켓과 별이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 같아서, 제 상자 집에 은색 별을 엄청 많이 그렸죠. 반짝반짝하게. 그리고 화재가 났던 벽에도 다 붙였어요. 그걸 보면 때리고 싶은 기분, 노숙인에게 화풀이하고 싶은 기분이 좀 없어지지 않을까 하고요. 그래도 상자 집을 발로 차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었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거기에서 그렇게 자고 있으니까, 그리고 여자 혼자 그렇게 자고 있으니까, 점점 옆에 박스 집이 늘어났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노숙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고, 습격이 아주 많이 줄어들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같이 밥도 먹어볼까? 해서 도로명을 딴 <246키친>을 열었죠. 각자 주워 온 음식들로 요리를 해먹는 키친을요.

 

유선 /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제가 있는 인터뷰였더라면 이치무라씨의 창작이나 활동 어느 한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서 질문을 던지거나 몰아갔을텐데, 그렇게 하기가 너무 싫어서 그냥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들으려고 했어요. 한국에서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 같이 어떤 재미있는 걸 해볼 수 있을지 논의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것이 아쉽네요. 조만간 초대를 해서 한국의 친구들과 이야기 자리를 만들어 보고 싶네요!

 

이치무라 / 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1
별똥별처럼 보이게 만든 자켓을 입고 노숙을 하는 모습. 2017년 12월 (사진제공 : 이치무라 미사코)


02
노숙을 하기 위한 상자 집에 붙인 별. 2017년 1월 (사진제공 : 이치무라 미사코)


03
블루텐트마을의 에노아루 카페 (사진제공 : 이치무라 미사코)


04

미야시타 공원 앞에서의 항의 행동. 2019년 3월 시부야구는 강제 철거가 있었던 미야시타 공원에 펜스를 설치하고 LGBT와 장애인에 관한 그림으로 장식을 했다.
핑크워싱,  아트워싱 앞에서 쫓겨난 노숙인들이 자신의 모습을 그려서 전시했다. (사진제공 : 이치무라 미사코)



 

이치무라 미사코

2003년부터 도쿄에 있는 한 공원 블루텐트마을에 거주하기 시작하여, 같은 텐트마을 주민들과 물물교환 카페 에노아루를 열고 있다. 2007년에 여성 노숙자 그룹 "노라"를 발족했으며, 국내외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나 페미니즘에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반올림픽 활동에 전념 중.

 

유선

노들장애인야간학교 낮수업 교사이지만 한 번도 교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치기도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비장애인 교사의 권위에 대해 생각한다. 인포숍카페별꼴의 매니저 6인 중 1명이며, 3명으로 구성된 다이애나랩에서 33.3%의 일을 맡고 있다. 고양이가 있고 커피를 하루 8잔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