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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숙제로부터
  • 이려진
  • 2019.11.26

27호 더봄 
나의 숙제로부터

이려진

 

 

 

그림을 좋아한다고

하고 다니는 건 뻥이다 

 

좋아했으면 

매일 그렸겠지 


 

라는 시를 썼다. 동료 작가로부터 ‘머릿속으로만 그림을 그리면 안된다’는 조언을 듣던 때였다. 처음엔 스스로 이런저런 면죄부를 줬다. 원래 창의적인 사람이 게으르다고 했어. 나도 때가 되면 그려낼 거야. 지금은 계기가 없어서 그런 거야. 하지만 언제나 그랬다. 전시가 코앞이거나 더는 미룰 수 없을 때가 와도 생각만큼 그려내지 못했다. 분명 머릿속에선 말이 됐는데, 이제 손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데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어딘가 마비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식은땀 나는 경험을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서 그리는 행위를 피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음에 안 드는 그림을 그려낼 바에야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얕은 속셈 말이다. 그렇게 오래도 숨어 있었다. 그러니 기어코 머릿속으로도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됐다. 슬슬 나와의 협상이 필요했다. 

혹독했던 지난 겨울 어느 날 작은 다짐을 했다. 낙서처럼만, 매일 한 장씩만 그려보자. 이대로 가다간 나의 손은 동파되고 말 거야. 작은 물방울이라도 끊기지 않고 똑똑 떨어지도록 수도꼭지를 살짝 열어두어야만 해. 어쨌든 그림을 좋아하니까. 

 

나는 이 작은 챌린지를 ‘#드로잉 숙제’라고 이름 붙인 후 나름의 진지함을 담아 다음과 같은 규칙을 정했다.

 

➊ 매일 최소 한 장의 그림을 그릴 것

➋ 작은 종이에 적은 시간 동안 그릴 것

➌ 고심해서 제목을 붙일 것

➍ 반드시 SNS에 올려 매일 작은 전시를 열 것


 

#1 숙제니까 하게 된다

 

손바닥보다 작은 연습장을 샀다. 매일 한 장씩이나(?) 그려야 하니, 아주 작게 그려야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선을 하나라도 긋기 시작하면 그 후엔 차라리 쉬웠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리에 앉고, 종이를 찾고, 연필을 쥐는 준비 운동이 철인 3종 경기의 수영, 사이클, 달리기 코스만큼 힘들게 느껴졌다. 재빨리 동료 작가 한 분을 꼬셨다. 서로 숙제 검사를 해주기로 약속했다. 일종의 강제와 감시자가 생기니 아이러니하게도 성실한 태도가 불쑥 올라왔다. 처음엔 주제를 두지 않고 그날그날 마주한 사건을 기록하듯 그렸다. 뒤숭숭했던 지난밤 꿈을 추적해 그리기도 하고, 유튜브에서 본 인상 깊은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 소화가 안 되던 날엔 위장 속 상황을 상상해 그렸고, 냄비 속에서 끓던 팽이버섯에 꽂혀 한동안은 팽이버섯만 그렸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간에 매일 밤 9시면 어김없이 그림을 찍어 SNS에 올렸다. 

 

01
<꿈에서 일해서 억울했다1>

 

02
<꿈에서 일해서 억울했다2>


03
<EBS 극한직업 유리공예 편을 보고>


04

<위에서 일어나는 일>


 

슬슬 소재가 떨어졌다. 주제를 정하고 그려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천, #스펀지, #오락실, #섞임, #되감기, #가짜○○, #진짜○○, #허황된 꿈 등 내일을 위한 ‘오늘의 주제’가 오가기 시작했다. 함께 하는 동료 작가와 주제를 주고받는 행위는 캐치볼 놀이 같았다. 매일 밤 숙제 제출과 검사를 마치면, 낯선 단어와 함께 타인의 생각, 에너지 그리고 기대와 응원이 탄력 있게 넘어왔다. 

 

 

#2 와, 미대 나온 사람 맞나

 

확실히 ‘주제’가 생기고 나니 그림을 구상하고 수행하는데 재미가 더해졌다. 물론 아무 그림이나 되는대로 그려놓고 제목을 정할 때 어떻게든 주제와 연관 지어 얼버무린 날도 있었다. 노트 한 권이 금방 꽉 찼다. 오랜만에 화방에 갔다. 전부터 갖고 싶던 외제 드로잉북을 샀다. 자신감이 붙었는지 크기도 한 뼘 더 넘게 키웠다. 선물로 받고 아까워서 봉인했던 아티스트용 연필 세트도 해제했다. 매일 같은 시간 책상에 앉아 사각사각 그림을 그리는 짓, 평생 안 하던 짓이 한 달을 넘어가니 가족들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주로 ‘서준이(6세 조카)가 그린 것 같다’라거나, ‘이게 뭐냐, 이건 너냐?’ 등의 질문으로 이루어진 피드백을 받았다. 나는 오랜만에 가까운 사람에게 그림에 대한 감상을 듣는 것이 즐거웠고, 우스꽝스러웠겠지만 항상 근엄한 태도로 성의껏 질문에 답했다. 


 

05
주제는 #천, 제목은 <피에타>


06
주제는 #빵, 제목은 <반죽>


07
주제는 #언덕, 제목은 <비빌 언덕>


08
주제는 #오븐에서 나온 것, 제목은 <그레텔>


09

주제는 #긴장하지 마, 제목은 <네버다이>



회심의 역작 〈네버다이〉를 SNS에 게시하자 ‘와, 미대 나온 사람 맞나’라는 댓글이 달렸다. 빵 터지는 웃음 뒤에 곧장 얼굴이 빨개졌지만 어쩐지 잘하고 있단 칭찬으로 들렸다. ‘이거 그리려고 막 미술학원 다니고 대학 다니고 했나’라며 댓글을 이은 동료 작가님은 누구보다 나의 투박한 드로잉을 좋아해 주시는 분이다. 그림 좀 그리라며 연필 세트를 사주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를 모르는 친구는 ‘네 그림에 악플 달렸다’고 걱정해 줬지만, 나에겐 최고의 응원이자 비밀스러운 격려로 마음속에 깊이 남았다.

 

 

#3 세상에 좋은 그림이 이렇게나 많은데 

 

100장에 3,000원 하는 종이 뭉치로 갈아탔다. 큰맘 먹고 산 외제 드로잉북 적응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고급 종이는 언제나 흑연을 잘 받아주고 풍성한 발색을 보장했지만, 불쑥불쑥 종이에게 송구한 마음이 드는 것이 문제였다. 적당히 받아주고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종이가 나와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됐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귀신같이 슬럼프가 왔다. 

 

 

10
#자유주제, 제목은 <이마트로>


11
주제는 #맛있는 것, 제목은 <맛도 있고 독도 있는 것>


12
주제는 #가짜○○, 제목은 <백설공주>


 

종종 사로잡히는 생각이 있다. 세상에 좋은 그림이 이렇게나 많은데, 재능이나 노력, 여건 등 모든 면에서 뒤처지는 내가 깨작여봤자 결국 의미 없을 거란 생각. 성실하게 드로잉 숙제를 하다가도, ‘이건 그저 낙서에 불과해, 언제 진짜 그림을 그릴 거지?’라며 틈틈이 자조하고 채근했다. 분명 하루에 한 장만 그려도 성공이란 마음으로 시작했건만, 조바심이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챌린지의 이름을 ‘숙제’라고 붙여서 그런가, 신비한 피동적 힘에 의해 꼬박꼬박 그림을 그리고, 올리고 또 그렸다.

 


13
주제는 #독립, 제목은 <까눌레>


14
주제는 #날카로운 것, 제목은 <생긴 거만 날카로운 것>


15

주제는 #오락실, 제목은 <민간인은 쏘면 안돼>
 

 

드로잉 챌린지를 지속한 지 두 달이 넘어갈 즈음, 괜찮은 발견을 하나 했다. 매일 새 그림을 그리고, 쳐다보고, 이름 짓고, 골라서 게시하는 경험을 반복하다 보니, 스스로 ‘잘 그린 그림’보다 ‘낯선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그림이 잘 그려지면 당연히 좋지만 그런 날은 드물었다. 대신 좀 못 그렸지만, 생소한 이미지가 나오는 날은 좀 더 자주 있었다. 내 손이 그었지만 낯선 선, 어쩌다 그려진 모양새, 속도와 힘으로 우연히 얻은 효과들이 종이 위에서 제각각 소리 지를 때 그 머쓱하고 반가운 기분은 꽤 중독성이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도 연필을 쥐고 앉아 나를 살살 구슬려 본다. 앞으로도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단 말이지? 그러려면 긍정이 필요해. 그림 그려서 좋은 날이 많이 쌓여야 해. 거칠고 이상한 그림을 그려도 날 냅둬야 해. 세상에 좋은 그림이 이렇게나 많으니까, 나는 일단 즐거움을 많이 챙겨야 해. 어쨌든 내 그림을 좋아하니까. 

 

 

 


이려진

요즘 그림 그리고 이것저것 만드는 사람 

https://www.instagram.com/yrio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