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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 같은 무엇, 혹은 교육이 될 수 없었던 무엇
  • 김인규
  • 2019.11.26

27호 곁봄 
교육 같은 무엇, 혹은 교육이 될 수 없었던 무엇
김인규

 

미술을 가르치는 것이니 예술교육이라고 말하면 간단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으니, 그것은 예술―교육이 단지 배우고 익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러한 반문은 늘 학생들로부터 왔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나에게 그런 질문을 직접 던지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수업에 들어온 학생들의 반응으로부터 그것은 온다.  


학생이 수업에 들어와 그저 수동적이거나, 그렇게 한 시간 때우고 간다면, 그것이 예술―교육과 관련이 있는가 하는 반문이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제시하고 학생이 따라 익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예술―교육,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예술과 관련이 있는가 하는 반문이 드는 것이다. 예술―교육이라면 문자 그대로 설명하거나 전달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경험과 상황에 있게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일’이라고 하는 ‘교육’이라는 말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교육’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는데, 그것이 과연 ‘가르치는 일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르치는 주체―교사’ 대 ‘배우는 대상―학생’의 일인가 하는 것이다. 아니, 뒤집어 말하면 학생은 과연 그러한 방식으로 배우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어떻게 배우게 되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거기에는 학생 스스로의 동인이 있어야 하는 셈이고, 그러한 동인이 형성되는 어떤 상황이어야 하는 셈이다. 교육이라는 상황은…  


학생은 학습하는 자, 단지 배우는 행위를 하는 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며, 학생이라 불리며 학교에 호출된 그룹의 일원이다. 배울지 말지는 그 이후의 문제이며, 그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도 그러니까 학생 자신이다. 나는 교사로서 그런 학생과 마주하게 되는 셈이다. 물론 나는 그들로 하여금 배울 수 있게 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려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다시 예술교육으로 돌아오면 예술이라는 것이 단지 그렇게 배우고 가르치는 상황만은 아닌 셈이다. 그러니까 예술이라는 상황은 그가 배워야 하는 존재이기 이전의 한 사람으로, 그들 그룹의 한 일원으로서의 삶을 송두리째 감싸는 무엇이여야 하는 것이다. 나는 예술교사로서 그런 그들과 마주하며 그 상황을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그저 책상에 코를 박고 엎드려 미동도 하지 않는 학생이 있다고 하자. 이미 그 학생은 학습에 임할 뜻이 없다. 교사로서 가서 깨워보지만, 학생이 고개를 잠시 쳐들고는 오늘은 아무 뜻이 없다는 눈빛만 보이고 다시 엎드려 버렸을 경우, 그는 더 이상 어떠한 상황이든 함께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때 그를 강제로 일으켜 세워야할 예술적 상황이 있을까 하는 반문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를 그만 그대로 놔두어야 하는 셈이다. 교육적인 상황으로 되돌아와도 비슷한 결정을 넘어설 수가 없다. 그는 이미 뜻이 없다. 물론 훌륭하게 설득을 하거나,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하여 학생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미 지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 그를 불러일으키는 것만이 반드시 교육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내가 수업을 설계할 때 고려하는 것은 학생들이 배울 의지를 갖게 하기 이전에 일단 자기가 놓여있는 그러한 상황에 흥미를 가지도록 하는 일이다. 배우고 안 배우고를 떠나서 흥미로운 상황을 조성하는 일이다. 그런 상황이란 아주 다양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떠나서 그저 재미있는 것일 수도 있고, 무언가 자신에게 절실한 어떤 욕구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으며, 탐구의욕을 느낄만한 주제이거나, 평소에 관심을 가질법한 공동의 문제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일단 학생들이 그러한 상황을 자각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우선이다. 때문에 나의 수업이 교과서에서 출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렇다 할 학습목표를 제시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이쯤 되면 전통적인 의미의 수업, 즉 교육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한발 한발 나아가면서 교육이 되어가기도 한다. 진행되면서 학습의 과제가 발견되며 그것을 향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수업의 예를 들어보자. 자유화 시간이었다. 종이와 물감을 제공하고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그리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에 공동의 학습 목표란 있을 수 없었다. 있을 수 있다면 ‘주어진 재료의 특성을 활용하여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여 표현하기’ 정도의 목표가 있겠다. 그러니까 내가 가르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들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표현하도록 배려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몇몇 친구들은 종이에 생겨나는 물감의 흔적에 심취하여 그것들을 반복적으로 탐구하며 빠져들었다. 나는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들은 어떤 탐구의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배운 것일까 아닐까? 1)


몇몇 친구들은 남학생 특유의 포르노 수준의 성적 표현에 몰두하였고, 일종의 성적 해방감을 만끽하였다. 그들의 표현 속에서는 ‘성’을 바라보는 시선, 혹은 ‘성을 즐기는 방법에 관련된 문화’, ‘여성에 대한 남학생들의 성적 태도’ 등 다양한 표현양상이 노출되었고, 논쟁적이 될 수 있는 측면들이 드러났다. 나는 그들의 결과물을 가지고 다음 수업을 이어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성적 표현의 즐거움 뿐 아니라, 표현이 가지는 정치성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그들의 표현에 성과 몸을 다루는 다양한 방식의 예술작품들을 대비시키며, 뒤에서 킥킥 거리며 즐기던 것들을 수업의 현장 안에 이끌어 들였다. 그것은 학생들이 이미 그러했던 것이다. 다양한 논쟁과 토론이 뒤를 이을 수 있었으며, 그 정치적 충돌의 지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2)


처음부터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시작한 수업도 있었다. 내가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더빌리지> 샤샤 카랄리취(Sasa Karalic) 선생의 '조정 (Adjustments)' 워크숍을 참여하고 난 후 그의 방법을 그대로 가져와 수행한 수업이었다. 그것은 참가자들이 자기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어떤 것들을 슬로건으로 만들고 대열을 지어 공공연하게 외치는 활동이었다. 다만, 일반 데모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표현을 포함할 뿐 아니라, 부정적인 이슈 또한 긍정적인 슬로건으로 뒤집어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과제를 함께 마주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나는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욕구나 처지를 말하게 하였고, 부정적인 것은 다시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꾸게 하였다. 그런 다음 학교의 적당한 곳에서 대열을 지어 그것을 외치는 활동을 기획하였다. 영상을 촬영하여 유튜브에 게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당연히 과정에서 끊임없는 논란이 발생했다. 그 논란은 다양했는데 이것이 미술활동인가에 대한 의구심, 구호를 긍정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 집단행동에 대한 거부감, 결국 이를 다 같이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참여와 불참은 각자의 권한이 되었다. 그렇다면 불참자는 학습을 거부한 것인가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수업은 결코 하나의 목표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러한 정치적 상황을 함께 나누며, 그것을 공론 속에서 대화 속으로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학생들 간의 입장차로 인한 갈등 또한 노출되었는데 교사가 해야 하는 일은 그것을 정치적 갈등이 아닌 배움의 과정으로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말하기와 듣기의 관계, 표현과 주장의 권한, 선택과 참여의 자율권,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등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이 되었다. 결국 수업의 끝은 참여하는 학생의 외침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의 관람이라는 형태의 퍼포먼스로 마무리하였다. 열려있는 구조는 대화의 장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나의 결론이 있을 수 없으며, 그러한 교육은 일방적으로 익혀야 할 무엇이 아니게 된다. 3)


이러한 방식들이, 가능한 내가 취하는 수업의 방식이다. 한번은 학교 급식실의 심각한 낙서 덕분에 학교장이 벽화 그리기를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나는 학생들과 당장 벽화그리기에 나서지 않았다. 학교장은 낙서라는 나쁜 상황에서 가능한 빨리 벗어나는 것이 목표였겠지만, 나에게는 그와 관련한 학생들의 삶의 현장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낙서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낙서라는 상황 자체가 수업의 출발이 되었다. 목표는 거기서부터 탐구되는 것이다. 만일 개선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면 그 이후의 일이었다. 학생들이 급식실 환경이나 그 낙서를 새롭게 마주봄으로서 그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불러내는 계기를 갖는 것이 수업의 주요내용이 되었다. 벽화 그리기는 그 와중에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환경을 바꿔야 한다면 학교장이 나쁘다고 여기는 것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알맞게 환경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수업은 정처 없이 떠돌았고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수업을 시작할 때 언제 끝내야 할지 계획을 세우지 않았음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당장에 무엇을 할지는 정해졌지만 그 다음엔 무엇을 할지 정해지지 않았다. 학생들과 무엇인가를 하고 나면 그 다음 할거리가 생겨났고, 그것을 하고나면 또 그 다음 할거리가 생겨났다. 그렇게 하여 수업은 점차 그 목표를 찾아갔으며 함께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너무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 성과가 학교장 뿐 아니라 학교 공동체 성원의 대부분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정말로 벽화가 완성되었을 때 다 같이 찬사를 나눌 수 있었다. 4)


그렇다고 늘 수업이 그렇게 만족스러운 결과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교사는 학생들이 무언가 배울 수 있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열린 대화이다. 서로 다른 점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며, 그것까지 함께 공유해내는 일이다. 교육이라는 장이 가진 장점은 숙제를 당장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학교―교육은 일종의 실험실이며 현실이 유예된 공간이다. 우리가 청소년을 바로 사회에 내어놓지 않고 학교에 붙잡아 두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성장기 삶을 엄혹한 현실로부터 유예하고, 대신 그것을 탐구하는데 시간을 투자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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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서천고 ‘사진으로 표현하는 남자와 여자’ 중 배태진 학생의 작품. 이 학생은 가정에서 엄마와 아버지의 모습을 대변하는 사진으로 제시하였는데, 이 사진이 보여주는 불편함에 학생들 사이에서 상당한 논란이 일었다. (사진제공 : 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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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서천고등학교 ‘우리의 외침’ 수업에서 제작한 영상의 한 장면―반어법으로 만들어진 이 한 문장 속에 많은 논란과 긴장이 담기게 되었다. 촬영 직전까지 학생들은 이 곳에 섰다가 떠나기도, 떠났다가 들어오기도 하였다. (사진제공 : 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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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천안오성고등학교 급식실 벽의 낙서 모습, 지어진지 개교한지 3년차 되는 상황이었다. (사진제공 : 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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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천안오성고등학교 벽에 벽화가 완성된 모습, 학교에서 생활하는 자신들의 그림자로 벽을 채웠다. (사진제공 : 김인규)



1) 2016년 서천고 미술수업 https://blog.naver.com/kig8142/220736069579

2) 2016년 서천고 미술수업 

   https://blog.naver.com/kig8142/220866499717

   https://blog.naver.com/kig8142/220878406683

3) 2016년 서천고 미술수업

   https://blog.naver.com/kig8142/220854633677
   https://blog.naver.com/kig8142/220862145308

4) 2010년 천안오성고 미술수업

   https://blog.naver.com/kig8142?Redirect=Log&logNo=140115896517&from=postView

 



 

 

김인규

29년을 현직에서 미술교사로 보냈으며, 2017년 퇴직을 하고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예술활동, 미술교육에 대한 연구 및 개인작업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https://blog.naver.com/kig8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