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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혜원 _어글리밤
  • 2021.02.20


 ‘아줌마? NO, 요양보호사. 국가 자격 취득한 전문가. 돌봄 필요해?…’ 어느 날 TV에서 들려오던 광고의 노랫말이다. 오나라 배우님이 랩을 뱉으며 ‘요양보호사’라는 직함의 중요성을 말하는 공익광고였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한 개의 광고가 더 나오기 시작했다. ‘TWENTY, TWENTY, 20도, 너도 나도 20도’라고 랩을 하는 광고는 겨울철 실내 적정온도를 알리는 공익광고였다.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간에 나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두 개의 공익 광고는 모두 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광고를 랩으로 구성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가사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함이 아닐까. 랩(힙합) 보통 힙합과 랩은 구분이 필요하지만 이번 원고에서는 편의를 위해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겠다.
은 모든 음악 장르를 통틀어서 가장 자유로운 내용으로 가사를 구성할 수 있고, 같은 시간 내에 가장 많은 노랫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게다가 힙합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광고를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광고의 메시지가 각각 국민건강보험공단과 한국에너지공단이라는 래퍼(화자)가 진심으로 쓴 가사라고 인식할 수도 있다. 전달력의 차원이 다르다. 물론 과대해석일 수도 있다.

 2018년,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분야를 처음 접하며 힙합과 굉장히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정의내리기가 힘들지만 이 분야에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단순히 정규교육과정에서 벗어나 문화예술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강사와 참여자간의 상호작용이 활발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27년 동안 알고 있던 사제관계의 정의가 바뀌는 순간들을 직접 경험하면서 오히려 강사들이 배움의 기회를 누리기도 했다. ‘힙합문화예술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실험(?)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그 시간만큼은 참여자들이 한 명의 래퍼가 되어 자기 자신을 가사에 녹여낸다.

 일차원적인 자기표현도 어려운 영역이지만, 힙합뮤지션들은 한 차원 높은 자기표현을 선보인다. 때로는 사회 문제에 대해, 때로는 내면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사를 통해 우리의 삶을 조명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루페 피아스코(Lupe Fiasco)는 <비치 배드(Bitch Bad)>에서 힙합 음악에서의 언어 사용에 대한 경계를, 조이너 루카스(Joyner Lucas)의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야(I’m not Racist)>나 차일디쉬 감비노(Childish Gambino)의 <이것이 미국이다(This is America)>등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처럼 힙합 뮤지션은 사회에 대해 나름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오죽하면 랩의 성격을 나눈 장르 중에 컨셔스(conscious)라는 갈래가 있는데, ‘의식적인’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사운드나 스킬 등 청각적인 장치보다는 음악에 담긴 정신을 주로 뜻하며 힙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이다. 이렇게, 래퍼는 시대를 담는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일까? 각자가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겠지만 유의미한 변화를 느끼게 하는 이슈 중 하나는 ‘환경’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교과서를 펼 때만 해도 선생님들은 ‘물을 사먹을 줄이야…’라고 하셨고, 최근에는 카페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컵 사용을 못하게 막더니 종이 빨대 때문에 불편을 겪기도 한다. K-POP으로 시작한 대한민국의 위상은 K-방역을 지나 K-PET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물론 환경문제야 산업혁명 이래로 항상 중요하게 다뤄왔던 문제지만 지금은 국가나 정부차원에서 중요성을 역설하는 게 아니라 개인이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그 무게감이 다르다. 이러한 현상에 역시 목소리를 내는 힙합 뮤지션들이 있다.


릴 디키(Lil Dicky) – 지구(Earth) M/V
릴 디키 유튜브(Lil Dicky Youtube)


 지구의 날(Earth Day) 50주년을 기념해 래퍼 릴 디키(Lil Dicky)는 전 세계 30여명의 스타들과 함께 ‘지구(Earth)’라는 음원을 발매했다. 지구와 환경을 보호하자는 미명 아래 거창한 메시지를 던질 것 같았지만 막상 노래를 들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지구를 구성하는 생명체가 된 스타들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Hi, I’m a baboon. Hey. I’m a zebra) 우리는 지구를 사랑한다는(We love the Earth, it is our planet) 간단한 메시지를 던질 뿐이다. 지금까지 등장했던 컨셔스 랩들과는 다른 방식의 메시지 전달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었지만 영향력 측면에서는 굉장한 성과를 거두었다. 공식 뮤직비디오는 현재 조회수 2.9억 회를 기록하고 있다.

 ‘에코힙합(eco hiphop)’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그린그레이’는 대전광역시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환경 래퍼’다. 거주지인 대전에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위치해 있다는 점과 환경단체에서 2년간 일했던 배경에서 그가 찾은 방법은 환경 문제를 랩 가사로 써 보는 것이었다. <핵보다는 해>, <핵 그만해> 등 탈핵(脫核)이슈 부터 <내복>을 통한 에너지 절감 문제, <바람이 되고 싶어>에서는 미세먼지와 관련한 일상을 풀어낸다. 외국의 랩들과는 다르게 우리나라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주제와 가사들로 이루어진 곡들은 청자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환경 문제에 대해 환기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원자력과 미세먼지가 비교적 최근에 회자되는 이야기라면 환경오염 이슈의 원조 격인 ‘지구 온난화’문제를 다룬 음악 역시 있다. 자이언티(Zion.T)는 무려 첫 정규앨범에서 <지구온난화>라는 곡을 수록했다. 자이언티만의 익살스러운 보이스는 ‘지구 온난화’와 ‘나나나나’와 같은 청각적인 재미를 주는 워드플레이(Word Play)에 초점을 맞춘 듯하지만 ‘이 사람아, 지금 대위기야’라며 뼈를 때리기도 한다. 앨범 설명에는 ‘우리가 흔히 지나쳐버리는 반복되는 일상의 조각일지라도 그는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새로이 스케치하고 그만의 주제로 시나리오를 적어간다.’라고 쓰여 있다. 차일디쉬 감비노(Childish Gambino)는 <여름 같은 기분이야(feels like summer)>에서 점점 더워지는 여름에 대한 경계(Running out of water)에서 시작해 생태계에 대한 위협(Air that kill the bees that we depend upon / Birds were made for singing Waking up to no sound)까지 느끼며 세상이 변하길 바라지만 쉽지 않은 현실에 자조하는 모습을 보인다(I’m hopin’ that this world will change But it just seems the same).

 환경을 바라보는 시선은 자연스럽게 우리네 삶으로 이동한다. 인간이 상호작용하고 있는 생태계인 사회는 동식물이 이루고 있는 생태계인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 콰이엇(The Quiett)의 <더 이상 울지마(No More Cry)>에서 제리 케이(Jerry.K)는 이런 현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아이슬란드에서 화산이 터지면
유럽대륙 전체가 화산재에 뒤덮이고
일본에서 발전소가 터지면
서울 하늘에 방사능 비가 떨어지고
살아있는 돼지를 구덩이에 던지면
비닐을 찢고 땅속으로 침출수가 퍼지고
봐, 존재하는 모든 건 연결되어 있어
굳이 Twitter나 Facebook 없이도
 
 제리 케이(Jerry.K)는 <마왕>이라는 곡에서도 대한민국의 환경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풀어내고 있다. 아이의 시선으로 권선징악의 과정을 묘사하는데 심판자를 ‘마왕’이라 칭하며(아빠, 마왕이 날 따라와요. 당신이 한 짓을 다 아나봐요.)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원을 아끼지 않는 인간들에 대한 비판(지구는 인간이란 출신 성분을 가진 이들에게 신이 주신 선물이라며 그 포장지를 찢어버리고)부터 환경윤리를 지키지 않는 기업들에 대한 비판(석유는 빼 쓰고 그보다 더 새까매진 물은 폐수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착각에 대한 경고(카트리나와 매미는 예고없이 불고, 오! 지배의 논리 그 착각이 낳은 시간표), 마지막으로 우리가 변하지 않을 경우 모두가 겪어야할 시련(신께 받은 그 선물을 물려주고 나면 저 마왕이 덮치겠죠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겠죠 죽어가며)을 언급하며 곡을 마친다. <마왕>은 뛰어난 가사와 표현력에도 불구하고 랩의 규칙과 힙합적인 요소 모두 부족한 점이 없어 여전히 유례없는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왕>에서 우리는 변화하지 않을 경우 죽음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경고장을 받았다. 이와 비슷하게 피-타입(P-Type)은 <오래 전에(A Long Time Ago)>에서 서기 2070년의 모습을 통해 지난 잘못에 대한 반성과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었던 과거의 모습을 추억한다.

잊혀진 신념들은 세월에 실려
태양계를 떠났지 신령처럼 모셔진 것은
생명이 아닌 기술
인간은 거슬러 올라갔지
불빛을 따라 자신이 걸릴 덫을 늘어놨지
더 쓸 필요 없이도 더 쓰더니
냄새를 뒤집어 쓴 죄의 증거들이
거리를 벌써 뒤 덮었어
욕망은 언제나 양심 따위보다 컸어
멈출 순 없겠지 돌릴 순 없겠지



대자연이 인간의 친구였던 그 시절 밤의 아름다움에 관해
우린 항상 노래 불렀어 그러나 모두 사라진 이제는 다 글렀어
따가운 볕이 드는 들판엔 어김없이 꽃이 폈지
꽃향기 위로 겹치는 손뼉 치는 아이들 소리 느꼈지
물결치는 바다 위 날개 펼친 갈매기 때 지겹지도 않은 듯 움직였지
 2020년 어글리밤은 문화예술교육랩(lab) <헬로우 아트랩>을 통해 ‘힙합야학’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음악을 통해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더욱 적극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하거나 실천에 옮겼겠지만 코로나-19라는 변수로 소극적인 활동에 그쳐야만 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다룬 문제들에 관해서는 참여자들의 인식이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바뀌어갔다. 릴 디키의 ‘지구(Earth)’가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제시해주지는 않았지만 곡을 감상한 어떤 이는 지구의 날이 4월 22일인 걸 알게 되었을 테고(나), 또 어떤 이는 환경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재단(LDF)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수도 있다(이것도 나). 탈핵 기자회견 최전선에 서서 ‘핵보다는 해’를 외치는 그린그레이부터, 메시지와 작품성을 동시에 잡은 <마왕>까지 인식의 변화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 글도 그 중의 한 방법으로 받아들여졌으면 한다. 환경 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표현하는 래퍼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많은 래퍼들은 여전히 시대를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