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곁봄
- 지지봄봄에게 제안하다
- 임재춘 _커뮤니티 스튜디오 104
- 202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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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봄봄》 30호다. ‘30’이라는 숫자를 해로 따지자면 2012년에 첫 호가 발행되었으니 올해로 10년이다.
처음 가는 마을에 들어설 때에
나의 마음은 어렴풋이 두근거린다
(중략)
이바리기 노리코의 시 <처음 가는 마을>의 첫 구절 같았다. 《지지봄봄》을 처음 시작할 때 말이다. 한 광역단위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일을 총괄하며 목격하고 느끼는 문화예술교육 상황은 거의 폐허와 다름없었지만 뭔가 실마리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새삼 오래된 감정의 기억을 끄집어 낸 것은, 그 실마리를 둘러싼 문제의식과 비평의 방식 및 주체, 효과의 의미 등을 되짚어 볼 시간이 된 것은 아닌지, 함께 진단해보자는 제안을 하고자 함이다.
2012년에 진단했던 문화예술교육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을 예로 돌이켜보면, 당시 공모를 하면 내용적으로 마땅히 선정해야 할 사업계획서나, 서툴더라도 저마다 흥미로운 호기심을 품고 있는 이들의 계획서 보다는 어쩔 수 없이 선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에 공모가 끝난 후, 선정단체에 대한 컨설팅과 평가 장치들이 강화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장치들의 원론적인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관리’의 행정적 증빙과 같은 가시적인 필요를 채운 것 외에 그들의 활동과 성장에 필요한 상호간의 자극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컨설팅과 평가를 주도하는 전문가들과 선정단체, 그리고 재단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간의 상호신뢰와 호혜문화가 부재한 상황에서 각자 그저 ‘했다’는 확인에 불과한 소극적인 결과만 남곤 했다. 무엇보다 ‘내가 가르치려고 하는 예술이 무엇인가, 또한 가르침과 배움은 어떻게 일어날까’와 같은 문화예술교육을 이해하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인식을 갖추려는 문화예술교육 활동가들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은 두어 번의 말(컨설팅)로, 그것도 대체로 일방적인,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 문제는 그들만을 향한 것이 아닌 문화예술교육 정책을 둘러싼 전달체계, 제도를 아울러 문화예술교육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비평웹진, 《지지봄봄》을 기획하다
자연스럽게 문화예술교육 활동 주체들이 자기 질문이 담긴 사업계획서 작성을 고민할 수 있도록 지원사업의 내용과 과정을 변경하는 작업의 필요성이 생겼다. 공모의 내용과 방식, 사업계획서 양식의 변화가 가시적인 것들이라고 하면, 근본적인 변화는 공모의 언어와 태도의 전환에 관한 것이다.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공모에 ‘심심한’, ‘동네’, ‘읽기’와 같은 언어들을 명시하여, 느리게 시간을 두고 탐색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바로 리서치, 또는 리서치적 태도다. 호객행위 하듯 ‘주민’을 모아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제공하여 소비하게 하기보다 문화예술교육 활동가들 스스로 질문을 발견하고 확장시키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가져야 한다는 일종의 촉구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어울리는 의미 있는 곁눈질이 기존의 컨설팅과 평가는 아니어야 했다. 그래서 감시와 훈수의 시선을 거두고 ‘현장을 지지해주고 보는 것을 도와준다는 의미, 보는 것을 다시 본다.’는 《지지봄봄》이 등장하게 되었다.
《지지봄봄》의 배경이 된 문제의식과 의미를 다소 장황하고, 그럴듯하게 서술하였지만, 실은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라는 가설의 기획으로, 답을 갖고 있지 않은 일종의 실험이었다. 『미적교육론』(김수현 지음, 현실문화, 2011)을 발문삼아, 예술가와 아이들을 춤추게 할 수 있는 문화예술교육 정책을 희망하고 상상하는 이야기를 담은 첫 호를 발행한 이후, 지금의 영향력 있는 비평지로서 《지지봄봄》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기까지(최소한 나는 이 웹진이 그런 역할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편집위원들과 필자들, 담당자들의 애정과 수고가 있었음을 짐작해본다. 그리고, 지금의 시점에서 그런 자부심은 비평 미디어로서 《지지봄봄》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설정하고, 스스로의 성과를 의심하는 태도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전달, 게시의 미디어를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이슈는, 비평의 주체와 방식(비평방법론이 아닌)에 관해서이다. 그동안 《지지봄봄》은 전문가 중심의 비평을 통해 내용의 신뢰감과 밀도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문화예술교육 전문가 풀(pool)이 풍부하지 않다보니 글을 쓰는 이들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소수, 전문가들의 생각과 언어에 갇힐 수 있는 문제로 이어진다. 정제된 언어의, 반박할 수 없는 올바름을 통해 새롭게 알고, 깨닫게 되기도 하지만, 표현되는 언어는 다소 서툴더라도 저마다의 삶과 실천 가운데에서 길어 올려진 생생한 언어로 기술된 다양한 올바름 역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각기 다른 삶의 정체성들이 당사자의 시선에서 표현되고 공유되어야 함과 그것의 가치를 말한다. 여기에는 '소수(전문가 숫자가 적다)'와 '전문가(전문성, 비평의 자격)'라는 다른 층위의 문제가 섞여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가에 따라 푸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비평에 있어 전문성보다 앞서 언급한 다양한 삶의 정체성이 당사자의 시선에서 표현되는 것을 강조한다면, 활동언어로 빈번하게 사용하면서 비평의 언어가 가진 권위를 흔들어야 할 문제가 된다. 그리고 당사자성이 갖는 자기 함몰의 위험성을 보완해주었던 기존의 비평은 '비평적 실천이나 활동'으로 개념을 확장하면, 문화예술교육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기획자들이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문해력과 기획력을, 경험적인 방식으로 제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좌우지간 무엇보다 《지지봄봄》이 이 문제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덧붙이건대, 이런 고민이 단지 비평가가 누구인가, 비평의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문제 삼는 단순한 지적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비평이 문화예술교육을 실천하는 활동가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정도나 두께에 대한 되돌아봄이라 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이번 30호 《지지봄봄》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이 담겨있다.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닌 문화예술 관련 비평 미디어(비유, 공진단, 헤테로포니)의 편집장들과의 집담회는 매우 힘이 되고 많은 영감을 받는 시간이었다. 이 외에도 비평의 방식을 고민할 때 필요한 앎으로서, 경험과 질문 등 여러 형태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기 위한 여러 이야기를 제안하였다.
표현과 기록, 공유와 아카이브, 그리고 생산된 기록의 큐레이팅에 이르기까지 《지지봄봄》이 이후 어떤 과제를 통해 다음을 준비하면 좋을지 구체적인 제안을 해본 셈이다. 지난 10년간 쓰인 글이 게시는 되어있지만, 주제나 (연관)키워드, 이슈, 필자, 기록자, 편집위원 등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아카이브가 되어 있지 않아 이에 대한 검토도 포함된다. 때마다 쓰여 졌던 귀한 글들이, 시의적인 것들이 아님에도 그때가 아니면 읽히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글을 매번 새롭게 생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같은 맥락의, 이전의 글과 자료를 함께 볼 수 있는 경로가 안내되어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좋은 질문, 실천가들의 질문의 주도성 회복되어야
지역 문화예술교육의 입장에서 정책 환경은 더욱 악화된 듯 보인다. 지역마다 편차가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중앙정부 예산의 의존도가 매우 높고, 내내 불안정했던 관련분야 인력의 고용 안정성도 여전하다. 달라지지 않은 상황을 두고 ‘악화’로 보는 가장 큰 징후는 많은 이들이 이러한 문제를 더 이상 문제로 거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뭐 다 아는 거, 말해봤자 바뀌지도 않아. 그거 원래 그러잖아.’ 등 변화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다. 늘 정신없이 뭔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문화예술교육 정책 자체도 생동감을 잃고 멈춰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대, 세상, 문제의 '진단'과 ‘방향성’을 근간으로 하는 정책의 기획과 업데이트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의심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구심과는 별개로 사업은 세분화되고 이를 관리하는 언어와 시스템은 더욱 고약하게 촘촘해졌다. 그러다 보니 팽배한 회의감은 새로운 생각과 도전, 실험의 의지를 불러일으키지 않고 결국 '좋은 질문'이 생기지 않는 악순환이 된다. 일전에 남극의 환경과 펭귄을 연구하는 이원영 님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코로나로 매년 가던 남극에 가지 못했는데, 그럼 연구가 불가능한 것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을 했다.
"할 수는 있어요. 다른 사람이 보내준 데이터와 기계 데이터를 보고 분석합니다. 그런데 숫자만으론 영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이유를 어떻게 알아낼까’ 현장에서 보면서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좋은 질문을 던지기 어려워지죠. 또 워낙 동물과 현장을 좋아해서 동물행동학을 택했기 때문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요.“
(원문보기: ▼(클릭)경향신문, "커버스토리 두고 온 가족 같은 펭귄들... 온난화 피해, 다음은 인간")
비평은 결국 질문이다. 질문의 주도성을 가질 수 있을 때, 내가 좋아서 할 때, 그게 삶이든 예술이든 좀 더 나아질 거란 희망과 기대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