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어들
- 상징을 바꾸고 우리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 변화의 첫걸음
- 임재춘 _지지봄봄 편집위원
- 2021.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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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봄봄 31호
한 발 벗어나기
상징을 바꾸고 우리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 변화의 첫걸음
채효정(‘오늘의 교육’편집장, 정치학자) 선생님과 대담을 기록합니다
임재춘(지지봄봄 편집위원)
임재춘 :
웹진 <지지봄봄>에 새롭게 ‘언어들’이라고 하는 코너가 생겼다. 문화예술교육 정책을 다시 읽어보는 것의 필요성에서 제안된 것인데 정책과 제도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정책 전반을 비평한다기보다 그 안에서 사용되는 언어들로 그 주변의 이야기를 다뤄보려 한다. <지지봄봄>은 텍스트 중심의 매체이다 보니 오히려 이 언어들을 중심으로 현장과 정책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시작을 채효정 선생님과 해보고 싶었다. 최근 경향신문의 칼럼과 <능력주의와 불평등>이라는 책도 읽었다. 환기되는 지점이 많아서 늘 예의주시하며 선생님의 글을 읽는 사람 중 하나이다.(웃음) 그래서 이 고민이 생겨난 계기도 선생님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선생님의 글 맥락 안에서, 언어들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 무의식적으로 차용되는 것의 문제점을 짚어내는 시각이 지속해서 드러난다.
내가 언어 주변의 맥락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는 이유
채효정 :군사독재시대에는 무력으로 지배했지만, 민주화 이후에 통치 방식이 바뀌었다. 그 방식이 언어라고 생각한다. 현재에는 총 대신 언어 혹은 미적 방식을 통해 통제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직접적이고 눈에 보이는 폭력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비가시화 된 폭력, 구조적인 폭력과 억압에 대해서는 인지를 잘하지 못하는데, 그렇게 만드는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가 언어라고 봤다. 그리고 그 언어는 세련되고, 사람들이 혹할만한 용어로 만들어지고 있어서 ‘언어가 발휘하는 지배와 통치의 기능을 계속 폭로하고 드러내야 한다’라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예전에 경기문화재단에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내가 초등학교 때 했던 부역, 독재의 역사를 고백한 내용이었다. 초등학교 학예 발표회 때 무용을 했다. 마지막에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춤추었다. 무궁화꽃 여섯 송이를 펼치며 마무리를 했는데, 그 꽃 안에 글자가 쓰여 있었다. 바로 ‘정의 사회 구현’ (웃음) 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 직후의 시기였다.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그 말만 보면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자고 하는데 누가 부인하겠나. 우리가 알다시피 전두환 시대의 ‘정의 사회 구현’은 삼청교육대에서 외친 구호였고, 목표는 일상의 병영화였다. 불온 분자들을 다 색출해서 깨끗하게 정리하는 청소작업을 ‘정화’라고 했다. 사회 정화를 ‘정의 사회 구현’이라고 했던 것인데,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뭘 알았겠나. (웃음) 내 기억의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이걸 아이에게 시킨 선생님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발휘했던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날 발표회를 본 사람 중에 몇 명은 얼마나 마음이 철렁했을까, 만약 광주와 이어져 있던 사람이 있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장면이었을까. 주로 독재정권에서 아이들을 시켜서 뭘 많이 한다. 우리 사회도 그런 것들을 계속 만들고 있었다. 역사적인 맥락으로 ‘광주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독재정권의 슬로건이었다.’ 라는 것을 빼면 그 단어 자체의 의미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발휘하는 정치적 효과를 떼어놓고 용어를 말하면, 의도치 않은 부역, 폭력과 억압의 질서들을 유지, 강화하는, 자기도 모르게 동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효과를 발휘하는 언어들이 무엇이 있을까? 계속 생각하고 나름대로는 언어 주변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을 드러내는 작업을 계속 했던 것 같다.
임재춘 :
선생님의 작업이 굉장히 고단할 것 같다. 나 혼자 주장하는 문제가 아닌, 다른 생각과의 부침이 있는데, 힘들지는 않나?
채효정 :
몇 해 전 ‘혁신주의’를 비판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혁신교육, 혁신사회라는 말을 많이 썼었다. ‘혁신’이라는 단어는 중립적인 개념이다. 딱히 보수적이지도 않아 진보 쪽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그런데 내가 ‘혁신’을 비판하니 진보 진영에서 비난을 많이 했다. ‘혁신교육’, ‘혁신학교’를 하시는 분들은 ‘우리가 했던 것들이 무화 된다’와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웃음)
사실은 행위자를 공격한 것이 아니고 그 메시지를 발화할 때 나타나는 효과들을 지적하여 다른 식의 언어로 바꾼다든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어떤 언어와 표상으로 만들어 내야 할까?’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던 것이다. 초반에는 사람들과 부딪혔지만, 현실이 보여주는 현상으로 정리하였다. 기술혁신의 결과가 기계의 자동화를 이끌어내면서 톨게이트, 공장 노동자들의 해고로 이어졌다. 혁신은 기존에 있던 질서를 폐기하는 과정인데, 혁신과 함께 엄청난 잉여물들이 발생했다. 이런 결과 속에서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같이 갖기 시작했다. 쟁점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초반이 굉장히 힘든데, 하고 나면 ‘나만 이런 고민을 한 것이 아니었구나.’ 알게 되고, ‘이거 아닌데?’라며 고민하는 사람을 발견한다. 아니면 나도 비판받고 반성하면 되는 거니까. 문제의식이 이어지는 시작점을 놓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임재춘 :
세련된 말들이 계속 나온다. 의미를 치장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반성(문제의식)에서 대안의 의도로서 새로운 언어들이 나오기도 한다. 과거보다 정치적 민주화나 문화적 인식이 높아졌다고 여겨지는 지금도 언어를 통한 부역이 여전할까?
힙한 언어들로 은폐되는 실천성
채효정 :더 안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예전에는 중간층 시민이 상태를 분별하는 역할을 했다. 예전에는 독재언어와 반독재언어가 선명하게 구별되었지만 현재는 그런 경계가 흐려졌다. 신자유주의의 언어는 그것을 흐리는 데에 목표가 있고 은폐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 그래서 지금 상황은 더 나빠졌다고 생각한다. 운동성과 저항성이 학문영역과 전문가영역에서 많이 후퇴하였다. 매끄러운 용어들을 발명하는 것에는 이런 상태를 은폐하려는 목적도 있다.
대표적으로 예전에 문화예술 운동을 하는 분이 ‘요새 소셜 디자이너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왜 사회운동이라고 하지 않고 소셜 디자인이라고 할까요?’라고 물었다. 이 안에는 운동과 디자인의 차이에 대한 질문이 담겨있다. 우리 집 청소년에게 되물어본 적이 있다. ‘너는 디자인과 운동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니?’. 그 친구가 답을 해줬는데 여기에 핵심이 있다. ‘디자인은 머릿속으로 구상하는 것이고 운동은 몸으로 하는 것이지.’ (웃음) 소셜 디자이너라는 말은 운동의 무게를 덜어낸 것이다. 입장을 가져야 하고 노선을 정하는 ‘무게’를 덜어주는 것이다. 몸으로 실천한다는 것, 운동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제지한다. 참신한 아이디어만을 착취하고, 변화를 원하는 열망과 욕구를 가져와 시장주의로 변화시킨다.
또 다른 예로 ‘체인지 메이커’ 라는 언어도 있다. 역시 사회개혁이라는 말보다, 체인지, 변화를 만든 사람들처럼 다가온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힙하다는 느낌을 주고, 전문가가 되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리빙랩’도 ‘생활정치’의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생활정치는 원래 ‘내가 서있는 삶의 장에서 정치를 시작하자’라는 의미가 있었다. 체제의 식민지, 상층의 구조에서만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생활영역의 삶을 바꾸어가자, 거기서부터 정치영역을 만들자’라는 이념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리빙랩’이라고 하는 순간 삶이 그냥 실험실이 되어버리니 생활정치의 의미가 희미해진다. 삶이 정치의 어떤 장소가 된다는 것과 그것이 실험장이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맥락이다. 세 단어(소셜 디자이너, 체인지 메이커, 리빙랩)의 경우에는 문화예술교육분야에서도 많이 사용되었고, 공모사업에서도 그런 언어을 사용하였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사고 구조를 저쪽으로 전환해 기울이게 하는 이정표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임재춘 :
강원도 문화예술교육웹진 편집위원으로 참여하시기도 했고, 예술가들이나 다양한 문화현장에서 선생님을 호명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선생님의 문제의식이 문화현장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채효정 :
먼저 도농 양극화 현상을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아까 언급한 용어들이 주체를 만드는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체인지 메이커’라는 단어가 듣는 사람에게 상상력을 주기도 하는 반면, 그 용어 때문에 더는 상상을 하지 못하는 집단도 있다. 언어가 장벽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사는 지역(강원도 인제)에서는 ‘소셜 디자인’을 내걸면 아무도 모른다. 용어자체를 모르는데 어떻게 뭘 시작할 수 있을까. 농촌마다 다 있는 ‘로컬투어’, ‘로컬푸드 사업단’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주로 ‘농산물직판장이구나!’라고 생각한다. (웃음)
사람들이 외국어로 꿈꾸는 경우가 드물듯이 나의 문화 영역과 동떨어진 생소한 단어로 상상하기는 어렵다. 문화예술계에서는 언어 때문에 상상력을 제한당한 사람들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나의 경험에서는 이런 단어 사용이 계급 간, 지역 간 양극화에 기여하였고, 이러한 부분들은 외부에서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문제로, 문화예술을 장치로 쓰는 관행이 남아있다. 8-90년대 운동할 때, ‘딴따라’는 늘 동원부대였다. 나타나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동원하는 동원부대여서, 나의 딴따라 운동 친구들이 항상 격분하면서 문화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지금은 과거보다 교묘한 방식으로 계속 이루어지는 것 같다. 현장에 있는 예술가들이 그런 부분을 많이 답답해한다. 도농의 문제를 떠나 용어가 생기면 그 틀에 끼워 생각하게 된다. 문화예술은 틀에 갇히기 시작하면 생명력이 없어지는데, 오히려 문화예술을 힙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으로 지원이나 공모사업들이 이뤄지는 것 같다. 이런 문제는 안에서부터 엎어야 하지 않나. 엎을 때도 우리에게는 언어의 무게가 필요하고, 미학적 저항, 예술적 저항이 필요하다. 예술적 저항이라는 것, 상징을 바꾸고 우리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문화예술 운동의 자립이 나타나야 하는 시점이다.
임재춘 :
이런 언어들이 유통되고 사회, 정책, 문화예술 담론에서 재생산, 확대되면서 현장 개별의 실천이나 개인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한다. 정책의 언어에 혐의가 짙다고 생각되는데.
정책의 혐의, 채굴되는 역량
채효정 :정책이 진원지다. (웃음) 그래서 정책 언어와 싸워야 한다. 유포하는 방식, 통제 방식과 싸워야 한다고 본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도 1년 만에 전 국민이 아는 단어가 되었다. 정책의 힘이 없다면 그렇게 될 수 없다. 모든 대학의 연구용역을, ‘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 연구해라’, ‘4차 산업시대의 문화예술교육을 해라’라고 하지 않나. ‘그린뉴딜’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2년 전에 한국 사람 중 이 단어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나. 농촌은 ‘그린뉴딜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문화예술교육은 ‘기후 위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고 계속 요구한다.
이런 현상은 정책적으로 퍼져나갔기에 가능하다. 정책은 돈과 네트워크가 있어서 이 현상을 계속 관철한다. 그리고 이 현상은 정치적인 힘으로 발생한다. 노동자가 원하는 언어정책들이 아닌, 자본과 현실 사회 속에서 지배력을 가진 집단의 언어, 그들에게 필요한 정책이 용어로 만들어져 퍼지게 된다. 정책의 구조들을 밝히고 깨는 것이 중요한 하나의 내적전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난번에 NGO에 대한 글도 썼다. 이런 언어가 오염되고 권력으로 작동하는 현상을 비판하지 않고 NGO가 정책의 중간관리 조직처럼 실행주체가 되었다. 우리가 20년 넘게 일을 하다 보니, 시민사회, 문화예술분야가 사고 자체를 정책적으로 하게 된다. 왜냐면 거기서부터 일이 시작되니까. 메여버렸다고 생각한다.
임재춘 :
선생님의 글을 보면 구조 내에서 “전문가”의 존재, 그들을 중심으로 한 위계가 작동한다는 지적이 있다.
채효정 :
힘을 가진 자들이다. 언어에 지분을 가진 사람들. 요즘은 시민사회에서도 활동을 통해 이력을 쌓거나, 지식연구를 기반으로 전문가가 되는 길이 있다. 어쨌든 자신의 활동을 입증할 수 있는 이들이라 생각한다. 저는 이런 전문가들이 지식계나 예술계에서는 문화적 멸종의 주범이라고 생각한다.(웃음) 애슐리 도슨이 쓴 ‘멸종’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하루에 100종씩 생물종들이 멸종되어 간다. 자본주의 경제라는 획일적인 경제1)가 글로벌라이제이션을 통해서 전 세계의 생물 다양성과 생태 다양성을 말살시키고 있다. 다 똑같은 종의 토마토를 먹고, 똑같은 계란을 먹는다. 우리가 먹는 계란이 딱 2종류이다. 그 책을 읽으며 언어도 같다고 생각했다. 민중 공동체 곳곳에 남아있던 이야기, 서사 문화적인 표출양식들이 획일화되고 있다. 생물학적인 종 다양성의 소실, 멸종의 상황처럼 “문화적 멸종”도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 기여하는 이들이 ‘전문가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임재춘 :
‘입증 가능하다’라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겠다. 그중에서도 우선 역량, 능력이 무엇인지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채효정 :
역량도 채굴주의 용어라고 생각한다. 기원을 보면 별로 좋지 않다. 2000년대 밀레니엄 개발 프로젝트에서 목표로 설정한 것이 “역량개발” 이었고, 거기서 교육도 강조되었다. 원조 담론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아프리카나 제3세계를 지원할 때 직접 원조를 했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인적자원을 개발해야 한다며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식의 역량개발 교육을 시작했다. 그 교육이라는 것이 서구식의 사고방식, 선진화, 근대화 등으로 불리는 것들이었다.
얼마 전 ‘한국사회에서 능력주의의 개발 기원을 보려면, 영화 <삼진그룹토익반(2020)>을 보면 된다.’라는 글을 썼다. (웃음) 능력주의는 IMF가 그 기원인데, 경제적 측면에서 ‘신발을 팔거나 수출해서 먹고살게 아니라 한국은 인간밖에 없다’라는 인식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 이후로 ‘인적자원을 개발해야 한다’라는 것이 신지식인, IT 영재육성, 벤처사업가 육성으로 이어졌고 최근에는 청년창업가육성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간을 역량 덩어리로 환원한다. 문제는 집단적 역량도 아니다. 민중의 세계에서 항상 발휘되는 힘은 집단적 역량이 다. 품앗이, 협동, 협력을 통해서 집단지성이 발휘된다. ‘역량개발’이라고 하며 개인에게서 추출한 데이터, 노동력이나 생명 에너지인데, 이것을 누가, 어디에 쓸까? 자본을 가진 이들이 상품화에 사용한다. 그래서 난 역량이란 말을 싫어한다.
임재춘 :
역량을 대신할 말은 무엇일까.
채효정 :
나는 계속해서 힘이라고 쓴다. 우리의 힘, 잠재력. 내가 가진 자원으로서 역량이 아닌 연결하거나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힘’을 쓴다.
임재춘 :
‘가능성으로서의 힘’은 최근 능력주의로 환원되어 공정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논쟁의 맥락을 이해하는데 공정과 함께 평등의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공정담론과 예술지원의 방향
채효정 :‘공정’은 방법의 문제이다. ‘평등’은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두 언어를 헷갈리거나 방법으로써 관계를 규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문제인 것 같다. ‘공정성’이라는 것은 예전부터 귀족들의 아비투스이다. 기사도 정신처럼 이미 동질적인 존재들 사이에서의 룰인 것이다.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들은 얼마나 평등한가. (웃음) 그것이 원탁이니까. 스파르타 시대의 특권적 시민들이 이룬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안에 들어와 있는 특권적 소수에게만 적용되는 룰인 것이다.
‘공정’이라는 것은 게임의 규칙이다. 그 전에 관계를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평등’은 규칙보다는 훨씬 더 근본적인 관계의 개선이다. 공정담론은 근본적인 것을 바꾸려는 시도인데, 여자와 남자의 관계,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어떻게 평등하게 바꿀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체제를 건드리는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게임장 밖이냐 안이냐의 문제보다는 관계를 바꿀 것인지 규칙을 바꿀 것인지에 대해 ‘규칙과 관계’로 설명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예술가도 두 부류가 있다. 안에 있는 사람, 밖에 있는 사람처럼 철저하게 기득권 리그에 들어가 있는 예술가가 있고, 기득권 밖에 나와 있는 예술가가 있다. 문화예술 자체도 양극화되어있기 때문에 예술가도 마찬가지이다. 요새 플랫폼 노동자를 ‘프리워커’라고 부른다.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1인기업의 원래 형태가 예술가이다. ‘프리워커’라는 말도 사실은 재즈클럽에서 그날그날 필요할 때 불렀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재즈클럽에서 일하는 불안정한 노동자를 부르는 말이 오늘날 비슷한 노동 형태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예술가라는 명제가 노동의 자리를 갖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문화예술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긱 워커(gic worker)2) 예술가들을 먹여 살리는 정책이다. 그러면서 예술가들을 길들이는 정책처럼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생계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도 아닌 굉장히 모욕적인 차원의 복지정책이 된 게 아닐까.
임재춘 :
공모라는 문화예술 지원방식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합리적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문화예술교육) 실천가들 사이에서 경쟁을 유발한다는 측면도 있고, 순응이라는 장치로써 작동한다는 문제의식이 많다. 대안은 무엇일까?
채효정 :
그들에게 예산을 일임하고 의논해서 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훨씬 더 다양한 사업이나 활동들이 나올 것 같다. 주제를 던지고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공모를 하는 것 보다는 말이다. 안에서 치고 박고 싸울 수도 있겠지만 민주주의 훈련도 될 수 있다. 예술가가 주도적으로 어떻게 예산을 쓸지 생각하고 상상하면서 민주적인 힘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예술분야는 상상력의 분야인데, 경쟁적이고 순응적인 환경의 정책과 제도는 더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씨를 말려 죽이는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가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임재춘 :
연결된 이야기인데, 주제는 조금씩 다르지만 선생님 글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방향성 중 하나가 ‘당사자들에게 물어봐라.’ 인 것 같다.
채효정 :
이것은 가능, 불가능의 문제가 아니고 꼭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정책용어로 ‘대상 발굴에 실패하다’와 같은 이야기이다. (웃음) 청년사업인데 청년이 없고, 학교 밖 청소년을 지원하는데 학교 밖 청소년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한다. 주체 발굴의 문제로 접근하다 보니 ‘우리가 못 찾는 것이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경로를 못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사자를 만나고 찾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은 삶의 뿌리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뿌리와의 연결지점을 끊어내는 순간 고사한다. 연결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연이 있는 출판사 사장님이 ‘출판은 이야기 싸움인 것 같아’라고 말했다.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여러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들이 사회에 번져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자신의 출판운동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이야기꾼이 되어 달라고 했다. 우리는 이야기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음악을 하는 사람들 역시 서로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퍼뜨리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사례로 우리 마을에 ‘역량강화 지원사업’이 있다. 우리 동네에서도 당시 ‘정원 만들기, 정원 역량 강화’ 등의 주제로 사업을 꾸렸다. 프랑스나 유럽에서 시골정원을 연구하고 오신 전문가 선생님이 강연을 여러 번 왔다. 유럽 시골마을들을 보여줬는데 감흥이 별로 없었다. 도시 사람들에게는 잘 꾸며진 시골의 풍경이 감흥이 있겠지만, 우리는 정원을 잘 꾸미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던 거라 ‘시골의 방치된 정원을 보고 무엇을 배워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강연자가 유럽 시골정원의 사진은 많이 보여줬는데, 정작 우리 동네의 정원은 둘러보고 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 마을의 정원도 시골 정원만의 미학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원 전문가가 우리 동네의 정원을 보고 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위계, 관전 등의 문제의식이 발생했다. 가르치러 왔기 때문에 이들의 정원은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 전문가의 시선으로 문화적 역량을 강화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임재춘 :
선생님의 이야기는 ‘평가’라는 지점과 맞물려 있다. 이야기나 역량, 능력, 전문가의 개입 등, 문화예술 내에서도 “공모”사업에서는 ‘평가’라고 하는 증명할 수 있는 잣대를 만들어, 나를 그 기준에 맞추게 한다.
평가, 정량화라는 폭력
채효정 :평가를 위해 정량적 수치 등의 기준을 만드는데, ‘평가받는’ 입장에서는 그 기준 때문에 긴장하고 눈치를 본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경험이지만, 평가하는 자와 평가받는 자로 나뉘게 되는 입장이 불편했다. 그걸 하면서 현장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어서 개인적으로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 자체는 ‘평가자’=‘평가받는 자’를 동시에 몰아넣는 것이다. 예산 때문에 안 할 수 없다면, 꼭 짚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자문 정도면 좋겠다. 우리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만큼, 현장에 있는 분들도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그리고 평가자가 아닌 현장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네트워크 체계로 전환되었으면 좋겠다. 점수 매기고 등수 매기고 정량화하는 체계를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평가자’=‘평가받는 자’의 구조가 아닌 공유하는 구조가 될 것이고, 지역 안에서 네트워크도 만들어지지 않을까. 제일 안타까운 것은 정말 좋은 팀이나 사업이 공모 과정에 지쳐서 활동하지 않게 되는 경우이다. ‘뿌리내릴 수 있는 문화예술을 우리가 죽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제일 후회되고 마음이 아팠다.
임재춘 :
문화예술교육에서도 ‘평가’와 관련한 고민이 계속 있다. 지역재단이 시의 행정이나 정치 그룹에게 문화예술의 효과성을 증명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다. 문화예술에 이해가 없는 사람들에게 문화예술의 효과성을 증명해야 되니, 수치화, 정량적, 가시적인 언어나 결과물이 필요하다.
채효정 :
자세히는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정량화하기 어렵다. 정량화할 수 없는 것을 해내라고 하는 것이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기업적 경영방식이 전 사회로 침투해 있는 것이 문제이다. 벤치마킹 같은 것을 엄청나게 장려한다. 예를 들어 이마트 광주점에서 진열이 잘 된 상품을 강릉점에 가져와서 동일하게 진열한다면 그건 잘 될 수 있다. 하지만 지역은 꼭 그렇지 않다. 조건과 역사, 맥락이 다 다르다. 사회 전반적으로 벤치마킹이라는 경영기법이 보편화 되어 있다고 본다. 어떤 사업의 구조와 형식을 지역에 맞게 바꾸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와서 진행하라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무모할 수도 있지만 ‘가치투쟁’을 해야 하는 지점이지 않을까. 예산 수립과 결정에 권한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산을 재수립하도록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는가. 이는 규칙의 싸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걸 분리한다. 학계도 마찬가지이다. 성과를 요구하는 정량화는 질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학계에서도 연구자들에게 성과를 요구하니까, 맞출 수 있는 방법은 하나이다. 하나로 쓸 수 있는 논문을 두세 개로 쪼개 쓴다. 5년에 하나씩 나올 것을 1년에 하나씩 쪼개 쓰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양적목표를 맞출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질적 목표는 떨어진다. 그래서 이를 강요하는 지배세력에 맞서서 가치투쟁을 해야 한다. 이를 바꿀 수 있는 것은 규칙의 투쟁이 아닌 세력과의 싸움이다. ‘가치투쟁’이라는 것은, 가치 생산의 방식을 깨부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근거를 수립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사회 운동도 필요하다. 그리고 횡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화예술 분야, 교육연구 분야로 구분한 테두리들을 허물어 정량화를 거부하는 연대라고 해야 할까. (웃음) 그런 방식으로 주체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재춘 :
최근 선생님 활동을 찾다보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하는 ‘제로의 예술’과 같은 프로젝트에서 강연을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협업하고 꾸준히 ‘오늘의 교육’을 만들고 글을 쓰는 노동자로도 지내고 계신다. 많은 활동 중에서 특히나 예술가와의 협업, 예술 내에서의 부름에 동참하시는데, 다른 현장과의 차이가 있는지?
채효정 :
예술가, 노동자, 교사라서 다르다기보다는 함께하는 사람들이 어떤 예술가들이냐, 어떤 노동자들인지에 따라 다르다. 내가 만난 예술가들은 반자본주의를 어떻게 예술적으로 표현할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예술이 또 동원된다. 더는 동원되는 예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뉴딜시대에도 예술이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했다. 파시즘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예술이다. 파시즘에 저항하는 예술가들이기 때문에 동지적인 연대를 해왔던 것 같다.
임재춘 :
내가 동원되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 사회정치적인 좌표에 예민한 사람 중 하나가 예술,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인 것 같다. 예술의 공공성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하면 되는 것일까?
사회적인 감각을 기르는 것이 예술, 예술가의 공공성
채효정 :예술가의 공공성이라면 사회적인 감각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적 감각을 다시 감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 그런 것들이 진짜 소중하다. 탈정치와 탈감각화가 큰 문제이다. 기후위기도 탄소 배출량의 감축 정도를 수치로 이야기하면서 단순한 숫자로 표현한다. 그러면서 우리 곁에 실제로 일어나는 고통과 비극의 감각을 자꾸만 흐리게 한다. 수치 비율을 바꾸면서 뭔가 될 것처럼 거짓 희망을 만들고, 정작 빨리 시도해야 하는 일들을 지연시킨다. 그래서 감각이 소중하다고 본다. 공공성을 이야기한다면 공공관리자로서의 역할이 아닌 ‘감각하기’, 우리가 공통으로 겪는 ‘고통을 표현하기’가 공공예술진영에 있는 활동가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예술의 공공성, 공공존재로서 중요한 이유다.
임재춘 :
다음 호에 기후위기, 생태적 관점에서 문화예술교육 정책을 리뷰해보고 싶다. ‘재구성한다면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주제를 잡고 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지점은 ‘감각’에 대한 것이다. 정치나 제도로 풀어야 하는 환경 이슈가 기본적으로 있지만, 문화예술교육에서 위기를 소재나 재료로 활용하는 차원을 넘어 어떻게 감각 하고 어떤 관점들로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마침 ‘예술의 공공성’과 연결하여 실마리를 주시니 도움이 된다.
글로 만났다면 보다 잘 정리되고 정제되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웹진에 잘 실어보겠다. 오늘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1) 획일적인 경제 : 정치ㆍ경제ㆍ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 각 국가들이 단일화되어 가는 현상. 세계가 단일한 체계로 서로 간에 긴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을 이른다.
2) 긱 워커(gic worker) : 고용주의 필요에 따라 단기로 계약을 맺고 일회성 일을 맡는 근로자를 이르는 말로,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공유경제가 확산되면서 등장한 근로 형태임
- 임재춘 / 지지봄봄 편집위원
- 인터뷰 및 정리 : 모든 게 처음인, 임재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