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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택수 _지구불시착
  • 2021.12.14

지지봄봄 33호

더듬어가기

느긋한 우정 - 현장이 사랑한 현장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 정답

김택수(책방 지구불시착)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 정답

택수가 묻고 수잔이 답하다

 
중랑구 주택가 5층 주택의 지하 작업실.
동네 구멍가게에서 700원에 산 라면 한 봉을 건네는 택수.

택수  이거 먹어. 사 올 게 이거밖에 없었어. 700원 있었거든.
수잔  이거 사 왔어? 그냥 와도 되는데.

의자를 끌어와 자리를 잡는다. 택수.
진행을 맡게 된 책임으로 다소 긴장해 있다.
수잔은 커피와 빵을 내온다며 분주하다.
택수도 지하 작업실의 작업 흔적을 따라 분주하다.
무심한 듯 붙여 놓은 메모, 스케치, 이젤, 유화 물감과 붓, 포장한 그림들, 공예 작품과 조명, 겹겹이 쌓아 올린 아트북.
수잔은 커피와 빵을 들고나온다. 조그만 접시에는 생크림이 올려져 있다. 센스 있다.

 
  • 수잔의 작업실 전경
  • 수잔의 작업실 전경
수잔의 작업실 전경


택수  예쁘다 이 잔.
수잔  아, 이거 엄마가 젊을 때 쓰던 잔이야.
택수  완전 레트론데.
수잔  조명이 밝다 그치?

일어나 형광등을 끄고 스탠드 조명을 은은하게 바꾼다. 그리고 아이튠즈를 켜고 플레이리스트를 몇 번 고르더니. 로우파이 재즈. 일순간 분위기가 바뀐다.
수잔에게는 수수하면서 고급스러움이 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수잔, 준비됐다는 무언의 사인.

수잔  오늘 인터뷰는 어떻게 해?
택수  사실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어. 녹음할까 말까? 기억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기억 하나도 못 할 것 같고. (웃음)
수잔  그래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이폰을 꺼내는 택수.
어플을 찾지 못해 허둥댄다. 보다 못한 수잔. 녹음 어플을 찾아 녹음 버튼을 누른다.
최초의 침묵, 이야기의 첫 관문을 잘못 들어선 느낌.
그래도 질문을 좀 준비해올 걸 그랬나? 후회가 밀려오는 택수.
커피는 이미 다 마셔버렸고 빵 조각만 계속 쪼아 먹는다.
뭔가 생각이 난 듯 갑자기 말을 꺼내는 택수.

인터뷰 풍경
인터뷰 풍경


택수  내가 황정은 일기 읽고 너 생각했다고 했잖아.

수잔과 나 사이에 모기 한 마리가 염탐하듯 날아다닌다. 수잔의 손바닥이 보자기에서 주먹으로 바뀌며 뻗는다. 그 팔이 길고 가늘다.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마주 앉는 수잔.

수잔  황정은 읽으면서요? 내 생각을 했어? 현남이 읽으면서 내 생각을 한 거 아니었어?

정지아 소설 자본주의의 적에 나오는 일명 자폐가족이다. 행동이 느리고 누워있기 좋아하는 그 현남이다.

택수  황정은 좋아하잖아? 황정은 소설하고 수잔의 속도감이 닮았어. 속도의 문제. 수잔의 독특한 속도가 있어. 아까 모기 잡을 때처럼.
수잔  아까 못 잡았어. (웃음)
택수  못 잡았어? 잡은 줄 알았는데.
수잔  잡은 줄 알았는 데 없더라.
택수  그러고 보니 어떻게 그런 속도로 모기를 잡을 생각을 해? (웃음)
택수  그래도 너만의 독특한 스피드가 있어. 모두 느린 걸로 알고 있지. 수잔하면 천천히. 빠를 때도 있어?
수잔  빠를 때도 있나? 요즘 말은 좀 빨라진 거 같은데. (웃음)
택수  그지? 그런데 너만의 스피드를 미터 퍼 수잔이라고 하면 어떨까? (웃음)
수잔  뭐? 미터 퍼 수잔! (웃음) 느리게 그리기 그런 거 할까?
택수  1수잔. 0.5수잔으로 그려보세요. 이렇게. (웃음)
수잔  그런 모임도 있나 봐. 어디서 들었는데, 천천히 산책하기 모임.
택수  천천히 산책하는 모임?
수잔  그런 모임이 있었대. 명상할 수 있는 산책, 천천히 산책하면서 명상하는 모임? 아무튼 갔었는데 자기는 너무 빠른 사람이라 엄청 힘들었다고 해. 나는 늙은 강아지랑 산책하니까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산책하는 거지. 그러다 보니, 돌도 보고, 나무껍질도 보고 그런 거야.
택수  우리는 1수잔하기 그런 모임 만들까? 좋다. 래연도 <종종걷기학회> 하잖아. 걷기 모임. (웃음)
수잔  우리는 얼마나 천천히? 몇 수잔으로?
택수  1수잔으로! (웃음) 1수잔 천천히.

어깨를 움츠리며 수잔도 따라 웃는다. 웃을 때 수잔 특유의 포즈. 시간이 흐를수록 존대가 사라지는 대화.
역시 편안 말에 익숙한 택수와 수잔.
자꾸만 수잔의 말을 끊는 택수. 이제 조금 민망한 수준이다. 대화는 끊어지고.
택수는 빵만 계속 먹는다. 그리고 몇 조각 남지 않은 빵을 바라본다. 보다 못한 수잔.

수잔  작업을 가늘고 길게 일하고 싶어요.

다시 존대.

택수  가늘고 길게?
수잔  네.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일을 했는데 서비스 업무였어요. 수당도 괜찮고 복지가 좋은. 많은 시간 일을 했는데, 회사 일은 돈벌이 수단일 뿐이라고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택수  아 거기서 배우는 게 있었다?
수잔  그곳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까 영향을 많이 받더라고요. 중요한 시간이었어요.
택수  (검지 손가락을 세워.)
그러니까 일은 두 가지로 나눠진 거야. 하나는 작업(그림)으로써 일. 그 일을 하기 위해 돈벌이 수단으로 회사에 다닌 거지? 그렇지만 회사 일은 돈 버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배우는 게 있었다, 그거지?
수잔 맞아요! 왜 이렇게 정리를 잘해? (웃음) 돈버는 수단일 뿐이라 생각하고 직업을 성의 없이 골랐는데, 그게 중요한 시간이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결국 나랑 안 맞는 거 같아서 그만뒀고, 지금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아무래도 미대 나와서 미술학원 선생님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거든요. 사실, 그렇게 멋진 일도 아니고.
택수  완전 멋있던데.
수잔  어렸을 땐 그랬는데, 가르치는 일이 미술을 떠나서 교육적인 부분도 있고 어렵기도 해서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결국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됐네요. 거기서도 배우는 일도 생기고 그래요.
택수  그거는 이건가? 처음엔 돈 버는 일과 하고 싶은 작업을 나눴는데, 지금은 하나가 되는 느낌?
수잔  이제 조금씩 합쳐지고 있어요.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면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가르치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요. 생각보다 배우는 것도 많고 재밌어요.
택수  가르치면서 배우는 거네.
수잔  네,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수잔 인터뷰
수잔 인터뷰


부끄러운 듯 웃는 수잔.
수잔과 택수는 마포구 이너프라운지 노프레임 전시를 11월 5일부터 3일간 참가한다. 갑자기 화제를 돌리는 수잔.

수잔  전시는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안하는데 자랑하기는 좋은 것 같아. 나 전시한다. 이렇게

톤이 높아진다. 진심 좋아하는 거 같다.

택수  요번에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많더라.
수잔  맞아. 우리 완전 오징어야.
택수  나는 갑자기 생각이 바뀔까 봐, 작가님은 안 되겠다고 할까 봐 쫄아 있어. 난 좀 불안해. (웃음)
수잔  오히려 사장님 그림을 더 좋아할 텐데. 사장님처럼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택수  안 그리는 거겠지.
수잔  못 그리는 거예요.
택수  거짓말 하지마. (웃음)

갑자기 스컬피를 만지며 또 화제 전환.

수잔  우리 무슨 이야기 하다가 말았지?
택수  별 이야기 없었어.
수잔  일 이야기 한 거 같은데 왜 일 이야기 같지가 않지? (웃음)

슬슬 위기감을 느끼는 택수. 돌파구를 찾는다.

택수  아이들하고 수업 재밌어?

수잔은 미술학원 선생님이다.
느린 어조로 진지하게 받아주는 수잔.

수잔  저는 생각보다 아이들을 좋아하더라구 요. 그냥 평범한 미술학원인데 일단 아이들이 귀엽기도 하고, 아이들이 그림 그리고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저 자신을 많이 보게 돼요. 신기하고 많이 놀라는데 아이들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해요. 애들이 즐겁게 그림 그리는 거 보는 것도 좋고.
택수  그럼, 아이들 작업이 수잔 작업에도 영향을 끼쳐?
수잔  네네. 무지개색 쓰고 핑크색 보라색 쓰면서 즐거워하는 모습보면 나도 이런 색 좋아했는데 하기도 하고 아이디어도 얻고요.
택수  아이들이 몇 학년이지?
수잔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 그런데 아이들 재료 보면서 나도 색연필도 사요. 사인펜 크레파스 같은 별거 아닌 재료 쓰는 거 보면서요. 무지개 연필 그것도 재밌더라고요.
그리고 만들기. 저는 만들기 너무 싫어했는데 애들이랑 하면서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아이들이 이상한 재료를 이상하게 쓰는데 (말이 빨라짐) 너무 재미있어요.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면서 같이 고민하고 협의도 하고. 싫다고 하는 아이도 있어요.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역으로 물어보기도 해요.
택수  와우! 이상적인 선생님이네.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 정답이라고 말해주는.
수잔  주변에 선생님들 보면 애들 힘들다며 괴로워하는 분들도 있고, 저도 가끔 힘들긴 하지만 재미있어요. 이런 건 힘들어. 애들이 재미있게 그릴 땐 좋은데 그림과 전혀 상관없이 말 안 들을 때.
택수 수업할 때 반응 없으면 힘들지. 그런데 초등학생들이 ‘아직 그림 더 그리고 싶어요, 종이 더 주세요.’ 하고 그러면 신나지.

두리번 두리번 주변을 살피는 택수.

택수  저거는 작품이 아니야?

책상 앞에 붙여 놓은 스케치를 본다. 하나같이 멋진 에스키스.

수잔의 에스키스
수잔의 에스키스


수잔  그냥 아이디어 스케치.
택수  스케치가 작품 같다. 너무 멋있다.
수잔  그래서 나도 괜찮은 것만 붙여 놓지.
택수  멋있다. 나도 이렇게 하고 싶다.
수잔  기억력이 안 좋아서 일단 이렇게 다 붙여 놓아요.
택수  색칠까지? 저렇게 다하면 거의 결과물 아니야?
수잔  결과물보단 과정이긴 한데, 어떨 때는 저게 더 멋있을 때도 있어.
택수  대개는 저게 더 멋있을 것 같은데. 너무 멋있다.

눈을 떼지 못 한다.

택수  순수 미술은 저런 과정이 필요한가?
수잔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대부분은 아이디어 스케치하는데 어떤 사람은 캔버스에 바로 그리지. 어떤 애들은 글을 쓰기도 하고 도표도 만들어요.
택수  그런 과정을 배우나?
수잔  대학교에서? 모르겠어. 안 배우는 거 같은데. 그림을 가르쳐주지는 않는 거 같아요. 배우면 안.돼.요. 그럼 사장님처럼 그리지 못 해요.
택수  큰일 났다. 나처럼 되면 안 되는데. 그림을 배워야 하는데 수잔처럼 그려야 하는데.
수잔  성향이 다 다른 거죠, 작품마다.
택수  그럼 그림 주제는 있어? 흐름이란 게 있을 것 같은데.
수잔  작업을 치열하게 해야 하는데, 치열하게 못해서 일상에서 찾고 있어요. 예전이랑 주제가 많이 바뀌었어요. 요즘은 키우는 강아지 보면서 많이 떠올라요. 이런 게 그림의 전환점인 것 같아요. 산책하면서 보는 거? 사람들이랑 같이 먹은 찐빵도 그리고 (웃음) 사장님이랑 교환했던 편지에서도 좋았던 글을 그림으로 그릴 게 있어요. 편하게 그리고 있는 거 같아요.
택수  여기 있으면 너무 편해지는 것 같아.
수잔  나는 안 편해 (웃음)

녹음 상태가 신경쓰이는 택수.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수잔은 조금 진지한 모습으로.

수잔  예전에는 그림 그리는 작업이 좋지만 너무 괴롭고 힘든 작업이었어요. 지금은 빠져나왔고요. 하다 보니까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는 분도 있고. 같이 만나고 고민하는 그런 게 좋은 것 같아요. 어디로 갈지 모르겠지만 욕심은 많이 안 내려고 해요. 살아가다 보면 좀 더 일상과 일, 글과 그림이 모두 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책방에서 글도 쓰게 되고 그림도 그리다 보니 책도 만들고요.

수잔은 97개의 돌의 일기 저자이다. 주워온 돌을 그리고 그날의 일기를 쓴다.

돌의 일기 그림들
돌의 일기 그림들


택수  수잔은 그림으로 칭찬받는 거하고 글로 칭찬받는 거랑 어떤 게 좋아?
수잔  글이 더 좋지.
택수  그지? 글도 잘 써. 수잔 돌의 일기 읽으면서 생각한 거야.
수잔  아, 진짜요?

깜짝 놀라는 수잔.

택수  수잔하고도 닮았고. 그래서 돌의 일기 책을 보면 다 합쳐져서 네가 만든 결과물이라는 게 보여.
수잔  일기를 너무 안 써서.
택수  일기를 많이 안 써? 또 그럼 다음 작업은? 책 안 만들어?
수잔  책 만드는 건 돌의 일기로 끝. (웃음)

요즘은 일기가 소홀하다고 말하지만, 인스타를 통해서 지우개 가루 이야기, 나무껍질 이야기, 살고 싶은 깍지집 이야기등을 엿볼 수 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다른 생각이 있는 듯 야릇한 표정이 웃음 끝에 묻어난다.

택수  분명 사람들이 많이 기다릴 거야.
수잔  이런 사람도 그냥 잘 살고 있구나. 이런 걸 보여주기만 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택수  자본주의의 적! (웃음)

수잔도 함께 웃는다. 지금까지 가장 큰 웃음이었다. 약간 여유를 찾은 택수와 수잔.
약속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갑자기 특별한 대화 없이 대화의 마무리 분위기가 감지된다. 녹음을 확인하는 택수.
녹음이 멈춰있다. 망했음을 직감한다.

택수  아 참 그럼 소개만 좀 다시 해 볼까?
수잔  책방에서 만난 사람들이랑 읽고 쓰고 그리고 있어요. 이게 다네요. (웃음)

천천히 같은 말을 한 번 더 말하는 수잔.

택수  더 멋있게 말할 수 없어? (웃음). 이제부터 나를 알아가세요, 여러분. 이런 거.
수잔  오래오래 하고싶어요.
택수  그래, 우리 오래오래 하자. 나는 책방 오래오래 할게. 너는 옆에 오래오래 있어줘.

수잔은 택수와 주고 받은 편지에서 영감을 얻어 오래오래라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 후, 우리는 몇 가지 더 이야기를 했다. 기획서에 관한 이야기, 텍스트 기득권에 관한 이야기, 누구와 닮았다는 이야기.
수잔과 택수는 계속할 건지 그만할 건지 시간도 정하지 않고 분위기 만으로 1미터 퍼 수잔의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이동해서 초밥 세트를 배불리 먹고도, 서비스로 나온 김마끼를 아이스크림처럼 손에 들고나와 먹으면서 걸었다.
경춘선 숲길 공원을 수잔의 노견 복순이와 함께 걸으며 느긋한 산책을 이어갔다. 스치는 나무마다 간섭하는 복순이처럼 메타세쿼이아 나무껍질과 솔잎이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해는 0.5미터 퍼 수잔의 속도로 서서히 저물어 갔다.

수잔 에스키스
수잔 에스키스


※ 모든 사진은 플러스마이너스1도씨에서 제공하였습니다.
 
김택수 / 책방 지구불시착
이랑 노래를 아주 많이 듣고, 이랑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림을 생각보다 많이 그리고, 생각보다 글도 많이 씁니다. 푸딩을 지나치게 좋아합니다. 좋아한다는 말을 너무 좋아합니다. 책방을 오래오래 하고 싶습니다. 충격에 약하고 아몬드봉봉을 먹으면 빨리 회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