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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14

지지봄봄 33호

더듬어가기

느긋한 우정 - 삶이 기획이 될 때 : 세 번째 삶. 최혜자

질문이 따르는 꿍함

김세영 (플러스마이너스1도씨)

문틈으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어온다. “강의하는데 너무 떨렸잖아. 주제에 맞게 잘 전달한 것 같아?” 도시, 문화, 공간에 대한 인문적 고민을 나누고 싶을 때, 최혜자 선생님께 강의를 부탁드리곤 한다. 주제가 너무 어려워서 준비하느라 혼났다고 투정하시면서도 늘 새로운 이야기를 맛깔나게 전해주신다. 꿀꺽꿀꺽 받아먹기에는 시대적 고민과 정보가 상당하기에, 이야기는 한동안 뱃속에 머물며 꿈틀거린다. 시간이 조금 흘러서야, 선생님께서 교육프로그램도 기획하시고 지역문화 연구와 정책 설계도 하신다는 걸 알았다. 문화 다양성, 문화예술교육, 장애, 공동체, 지역을 꿰며 다양한 활동을 넘나드는 줄기가 궁금했다.

대학교 3학년
대학교 3학년시절의 최혜자선생님

 

발아되는 순간

어떻게 문화연구, 정책설계를 하게 되셨나요?
2000년부터 지역에서 문화 운동을 시작했어요. 군포문화센터의 관장을 하면서 공연, 생활문화, 자원봉사 등을 실험했는데요. 위탁받아서 운영하다 보니 행정과 정책이 이해는 안 가고 그저 너무 나쁘다는 생각만 드는 거예요. 정책수립자들은 현실이 어렵다고 하면서도 그 현실이 뭔지 설명은 안 해주더라고요. 납득할 수 없는 일을 계속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정책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문화정책연구소에 들어갔고 문화예술교육정책을 설계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됐죠.

현장에서 분함을 느끼며 정책 공부를 하셨으니까, 연구할 때 마음가짐이 좀 다를 것 같아요.
그게 제 연구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해요. 지역에서 일할 때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은 행정, 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요. 현장은 늘 바쁘고 시간이 없어서 연구까지 직접 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저희가 알아보고 얘기해드릴게요.’ 이 스탠스를 벗어나지 않으려 하고 있고 이 선에서 역할을 하려 해요.

연구하시면서 답답했던 안개는 걷히셨나요?
당연히요. 그리고 이것을 전문성으로 읽어주더라고요. 자신의 질문을 꾸준히 가지고 가서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전문성이잖아요. 공부하면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하는데요, 질문을 갖지 않은 연구자는 마지막 말을 쓸 수 없어요. 그러면 다 똑같은 내용으로 끝나는 욕 먹는 연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을 마무리할 때 1cm만 더 가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1cm 가는 게 정말 힘들어서 마지막 연구 쓸 때는 지랄이 풍년이에요. 그렇게 해서 결국 이런 보고서냐고 할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1cm를 위해 뭔가 뚫고 가는 느낌이 있어요.

 

작업을 위한 사전 단계

연구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이 궁금해요.
자문자답하며 현장의 경험을 끄집어내어요. ‘그게 왜 중요한가, 알면 무엇이 달라지나.’ 연구를 의뢰한 주체들에게도 수없이 빙의하고요. ‘무엇이 고민이고 무엇을 알고 싶을까, 이들이 어떤 돌부리에 걸린 걸까.’ 질문을 통해 그들과 동일시하고 방향을 찾아가요.
저는 학문에 뜻이 있던 건 아니어서, 현장에서 실천하다가 공부를 병행하며 단계별 학습을 해왔어요. 지금도 당시에 가진 질문을 꼬리표로 가지고 있고 그때의 고민을 현실태로 이어가는데요. 성격으로 보면 꿍하다는 소리예요. 저에게 꿍하다는 것은 증오나 갈등을 만드는 의미가 아니라, 계속 질문을 만든다는 의미예요. 질문이 생산되니까 사적으로는 성찰을 더 하게 되고, 다음 학습에 토대가 되어요.

현장 연구라고 하면, 실질적으로는 어떤 과정이 벌어지나요?
현장을 기반으로 개인 인터뷰나 그룹 인터뷰를 많이 하는데요. 연구 과정의 부분을 뚝 잘라서 사람들과 활동으로 엮기도 해요. 활동을 강의로 만들기도 하고요. ‘마을학교’ 할 때, 30명과 그룹 인터뷰하는 과정을 활동으로 만들어봤는데 의외로 재밌게 참여하셨어요. 저 혼자 연구하는 건 너무 심심하니까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것 같아요. 때로는 연구 과정이 단순한 것 같아서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고요.

사실 저희에게는 연구자의 가설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은 작은 반항심이 있는데요. 초반에 세운 연구가설이 완전히 벗어났던 적도 있나요?
처음 세운 가설을 마지막까지 쓰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어요. 항상 새로운 것이 발견되고, 또 발견될 때까지 계속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연구의 결론을 어떻게 내릴까 늘 고민하는데, 그룹 인터뷰 때 한두 분이 스르륵 건넨 얘기 속에서 키워드가 나올 때가 있어요. 보고서로 정리되는 언어는 다르지만, 그분의 얘기가 방향이 되죠.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간

연구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질문을 풀어가시는데요. 선생님의 작업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캐나다에서 공부하다가 이민 신청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보니까 요리를 하든, IT를 하든, 기술이 있어야 하더라고요. 내가 가진 삶의 기술은 뭘까 보니까 생각과 언어였어요. ‘나는 한국에 있어야 하는구나.’ 싶었죠.
그래서 조잡하나마 작업 영역을 소개하자면, 추상 영역이에요. 인간의 주체성, 관계, 공동체성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요. 삶을 읽는 시선으로, 오늘의 나와 무궁무진한 세계가 연결되는 가치관의 문제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요. 이것을 보고서와 프로그램, 강의로 만들고 있죠. 추상적인 삶의 태도나 가치를 표현하는 언어로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 여기까지가 제 역량이 아닐까 해요. 그런 의미로 어디 가서 스스로 저를 예술가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예술가라고 생각해요.

  • 2012 캐나다 횡단
    2012 캐나다 횡단
  • 2012 캐나다 횡단 시작
    2012 캐나다 횡단을 시작하며


내가 가진 시선이 타당한 것일지 의심이 생길 때는 어떻게 하나요?
옳은지 아닌지 헷갈리는 그 고민까지 사람들을 초대해서 같이 논의해요.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동의를 구하는 과정에서는 조심하고요. 아무리 설득하는 내용이 옳다고 해도 태도가 그르면 안 되는 거니까. 그러다가 만약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빨리 사과해요. 시간 끌지 않고 바로 사과하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이건 자존심의 영역이 아니고, 오히려 몰랐던 것을 알아서 기쁜 영역이에요.

설득과 동의, 사과를 얘기하셨는데요. 활동과 연구 과정에서 사람 사이의 부대낌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노동 운동할 때 우리 조합은 500명이었어요. 30%는 열성파, 30%는 언제나 반대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 40%를 어떻게 설득하느냐에 따라 펼쳐질 상황이 다르더라고요. 그들의 마음을 획득하느냐에 따라 나머지 30%가 달라져요. 말만 하면 이간질하거나 틈만 나면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도 다수 앞에서는 눈치를 봐요. 소수자의 태도가 되는 거죠.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호의 있기를 바랄 수는 없어요. 어느 프로그램에나 삐딱하고 모임을 와해시키는 사람이 있는데요. 다수에게 공감을 받아서 그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해야지, 사람 속에 있는 부정성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 싶어요.


모두를 향한 이야기, 나를 위한 기록

강의도 그렇지만, 보고서도 어려운 단어 없이 술술 읽혀요. 퇴고를 여러 번 거치실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역시도 세금이 사용되니까요. 그래서 2006년부터 2010년 동안 한참 블로거를 하며 고등학생 정도면 알 수 있는 문장을 쓰려고 노력했어요. 블로그 내용을 미리 쓰고 언어를 계속 바꿔갔는데요. 가독성 있게 문장을 자르고 불필요한 수사는 지우면서 만연체는 피하는 훈련을 했어요. 사실 개념어를 쓰지 않고도 얘기할 수 있는데, 영어나 라틴어, 심지어 히브리어까지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요? 누군가 제 글이 쉽다고 말하면 칭찬으로 듣는 이유이고요. 더해서 노동운동 당시 우리 조합원의 평균 학력은 중학교였어요. 쉬운 언어로 말하는 훈련은 그때 된 것 같아요.

연구나 정책을 알면 활동의 좌표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실질적으로도 도움이 될까요?
매우 많이 되지요. 정책 내용을 딸딸 외우는 것은 도움이 안 될 거로 생각해요. 정책이라는 건 그 시대의 가치와 상황이 만나면서 생기는 과정이라, 이 맥락을 휘발한 채 암기만 하면 도움이 될 수 없겠죠. 사회경제에 대한 학습도 필요하고 철학도 필요할 거예요. 사회 전반을 가장 높은 단위에서 쳐다보는 것이 철학이니까요.
그런데 철학적 토대는 가방끈이 아닌 사유체계로부터 형성된다고 생각해요. 때때로 자기 삶에 관해 해안이나 통찰을 가진 어르신을 만나는데요. 그분들은 자기 경험을 질문하고 성찰하고 해석하면서 습관적으로 어떠한 구조를 형성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이런 사유체계를 훈련하고 싶다면, 공부하는 방식이 조금 바뀌어야 하겠죠. 예를 들어 푸코를 공부한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 당시 유럽은 어땠는지, 어떻게 자랐고 대학에서 어떤 책을 읽었는지 콘텍스트를 보는 거죠. 덜러덩 있는 정보 하나, 텍스트 하나는 절대로 자원이 될 수 없다고 봐요. 그래서 야사를 바탕으로 공부하면 맥락을 아는 데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맥락을 알면 미래도 읽을 수 있을까요?
사실 미래는 잘 모르는 영역이죠. 자본주의는 어떻게 될까, 기술이 전 세계를 뽕뽕뽕 뚫어놨는데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까, 이런 고민이 늘었어요. 우리가 유기체로서 물리학적 원리에 지배받고 움직이는 존재라고 한다면, 세상의 변화를 읽는 중심은 물리학, 철학,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물리학의 발견, 철학자의 얘기, 예술가의 실험을 계속 들여다보는 게 중요할 테고요.
예를 들어 뉴턴이 운동량 보존의 법칙을 얘기했는데, 아인슈타인에 와서는 상대성 이론이 제시되어요. 원자폭탄을 경험하며 원래 가진 에너지가 증폭된다는 사실을 알았죠. 빅뱅에서는 에너지가 확 빨려들더니 사라지고요. 에너지는 원래 그랬던 것인데, 누군가가 새롭게 발견하고 언어를 붙이는 순간 모두가 인지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인식의 확장은 넓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시화되는 것이기도 해요. 주름진 세계의 각 끝만 알았다가 어느 발견으로 인해 주름 사이사이의 촘촘한 것들을 알게 되는 거죠.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을 기술이 증명하고 예술이 보여준다면, 앞으로의 변화를 읽기 위해서는 바로 이 대목을 봐야 하는 거죠. 과학은, 철학은, 예술은 어디까지 얘기하고 있을까? 저도 실험예술을 보면 난감할 때가 많아요. 왜 작가가 저렇게 하려고 했을까 들여다보려고 해요. 대부분 설명을 못 들어서 질문으로만 남아있는데, 이 질문을 계속 가지고 가다 보면 어떤 상황에서 아귀가 딱 맞을 때가 있더라고요. 그럴 때 저도 인식과 감각의 지평이 넓어지는 느낌을 받아요.

  • 2015 인생나눔교실 회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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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생활문화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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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상으로

앞으로는 어떤 공부를 하고 싶으세요?
문화에 관한 고민은 끄트머리까지 온 것 같아요. 새 문화가 만들어지면서 언어, 상징, 이미지와 코드가 어떻게 생산되는지까지 왔는데, 그게 결국 예술이잖아요. 사실 문화와 예술에 관해 공부를 쭉 하면서 나중에 파고들려고 남겨둔 주제가 있어요. 앞으로의 예술은 어떠한가. 근대적 예술에서 탈주한 예술이 새로운 영토를 만드는 과정은 들뢰즈를 통해 공부하며 추적하리라. 다짐하며 남겨두었어요. 이 사람이 얘기하는 영토, 리좀, 고원, 탈주한 이후에 이루어지는 수많은 의식의 흐름, 현상을 만들어가는 방식들이 아마 이후의 예술과 관련 있을 거로 생각해요.

일과 공부 외에 일상적으로 하는 것, 혹은 좋아하는 것이 궁금해요.
거의 매일 집에 가서 드라마 한 편씩은 보고 자요. 생각으로부터 잠깐 도망가기 좋거든요. 그리고 수도 없이 잠수타요. 잠수 시간이 삼십 분, 한 시간 정도이지만요. 맛있는 걸 좋아해서 먹는 것도 재미있는 과정이에요. 그리고 좋아하는 책은 늘 이동해요. 열 권 넘게 사서 선물했던 책이 세 권 있기는 한데,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모모』,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 그렇고요. 사실 저는 사람에게 빠지는 편이에요. 이순신한테도 한창 빠져있을 때가 있었어요. 지도를 큰 것 사서 그림 그리며 그의 행적을 좇았는데, 공부는 덕질로 하는 게 아니겠어요?

인간의 무언가를 꾸준하게 긍정하시는 것 같아요. 선생님 삶의 만족도는 어떠신가요?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고 있으니까 힘들긴 하지만 만족해요. 저는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에 행복을 두고 있지 않아요. 세계 자체가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고 존재 자체가 그러니까요.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비교적 알아서, 자신을 탐구하는 것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과 함께 잘 지내는 데 의미를 두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내 욕망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 같아요.

  • 2015 생일날
    2015 생일날
  • 2020 문화디자인 자리 사무실 파티 전경
    2020 문화디자인 자리 사무실 파티 전경


※ 모든 사진은 최혜자님으로부터 받아서 활용하였습니다.

김세영 / 플러스마이너스1도씨
목2동에서 나고 자란지 한참인데, 이렇게 잘 누비고 제대로 발 딛기는 오 년 정도 되었네요. 제 꼴대로, 제 멋대로 살아도 되는 문화를 그리며 동네에서 이런저런 기획을 하고 있어요.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골칫거리를 만들겠다며 끙끙거리는 모습이 그렇게 웃기고 또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