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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수
  • 2024.12.05

지지봄봄 42호

-만남의 문법들

표류기

발견과 만남

이성수(힘빼고컴퍼니 대표)

1. 결론부터 말하자면, '접근성'이 바로 예술

예술이란 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인식하며 살았다.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그러했다. 그런데 중도 시각 장애인이 되고 30대 중반 가량 되었을 무렵 우연히 삶의 이벤트처럼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게 되고, 모처럼 살아있는 기분을 느낀 것이 좋아서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다가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크고 작은 공연장에서 수십 여 편의 공연을 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책도 쓰고, 최근에는 직접 창작 단체를 만들어 적극적인 창작 활동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나에게 배우 혹은 연출 혹은 연극인 혹은 예술인 혹은 작가 혹은 창작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생겼다. 이러한 수식어가 여전히 낯설고,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되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곤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어느 순간 정말 예술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고, 지금 나는 감히 예술인이 되어있다고 말한다.

나는 '접근성'으로 인해 연극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물리적 접근성뿐만 아니라 정서적 접근성과 감수성 그리고 당사자성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그 시기와 맞물려서 첫 무대의 맛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지금껏 연극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접근성은 닿아야 할 곳에 닿게끔 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닿게 하는 판타지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연극과 만난 나는 그전까지는 해본 적 없던 생각을 하게 되고, 상상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새로운 꿈이 사슴의 뿔처럼 솟아나고, 그 꿈은 다시 나에게 자긍심을 주고 그 모든 것이 '예술'이라는 하나의 초점으로 모여드는 순간이 차곡차곡 쌓여왔다. 이렇듯 접근성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하고 강력한 모티브가 되기도 하니, 그것이 곧 예술이라고 말한다.

2. 발견하는 당사자

접근성은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창작'이라는 말을 내 앞에 가져다주었지만, 그 과정은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희곡이나 소설 한 편 써보고 싶었지만, 어디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고민을 거듭하면서 나의 이야기, 나와 닮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욱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눈이 생기기 시작했다. 2016년 현대 무용가 안은미 선생님과 시각 장애 당사자의 일상을 소재로 함께 만들었던 무용 공연 '안심댄스', 2019년 신재 연출을 만나 나의 일상을 더 깊이 파고들어 작업을 했던 연극 '관람모드:보는방식'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러한 경험들이 협업자로서의 당사자를 지나 창작자로서의 당사자로 길을 안내했다.

이야깃거리들이 점점 많이 생겼다. 아니, 발견되었다. 마틴 스코세이지, 봉준호 같은 영화감독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라고 했던 말이 피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페드로 코스타의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과 나의 주변에서 이야깃거리가 너무나 많이 발견되었고, 개인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보편성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마구 올라왔다. 마치 한 순간에 보물섬에 온 것처럼, 어느 보석부터 손에 들어야 할지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먼저 선택한 것은 '안마사의 이야기'와 '저시력자의 이야기'였다. 최근 나는 그 두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가오는 2025년, 26년 그 이후까지도 상상하고 또 상상한다.

3. 배리어컨셔스(barrier-conscious) 연극 <국가공인안마사>

2023년 배리어컨셔스 연극 <국가공인안마사> 극작과 연출, 배우로 참여하면서 시각 장애 당사자 연출이 되었다. 시각 장애' 혹은 '시각 장애인'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세세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안마사의 이야기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야기를 발견하게 하고 싶었다. 시각 장애인 안마사와 연극인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나'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출 경험이 없었고, 시각 장애가 있는 나로서는 직접 공연을 제작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공연 연출가 몇 명을 찾아가 제안했다. 모두 크게 공감하고, 꼭 필요한 이야기라며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나 각자의 계획이 있어서 직접 작업하기는 힘들다는 반응들이었다. 고민 끝에 직접 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때로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것이 삶의 무기가 되는 순간도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런 순간일지 모른다고 느끼며 말 그대로 무모한 도전을 하게 되었다.

어렵게 스태프와 배우를 모았다. 시각 장애 안마사 역할에는 당사자를 캐스팅했다. 시각 장애 안마사들의 이야기를 알리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장애로 인한 차별과 편견으로 다소 쪼그라들어있는 그들의, 우리들의, 나의 마음에 위로와 공감을 줄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자 했다. 그것은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해당하는 정서가 아닐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 그랬다. 기술적 면에서 어설픈 연극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의 힘은 그 어느 연극에 못지않다고 자평한다.

'배리어컨셔스 연극'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데에도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배리어프리, 배리어프리 하지만, 정말 배리어로부터 프리한가 하는 질문은 공공연한 것이었다. 무턱대고 '프리'를 말하기 전에 진짜 ‘장벽’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다시 진단하고자 하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배리어컨셔스'라는 말은 내가 만든 말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사회학적, 장애학적 용어였다. 그러나 그 용어를 연극에 붙인 사람은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었다. 연극에서도 접근성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는 만큼 배리어프리 연극 혹은 접근성 연극에 대해서도 다시금 돌아보고자 제안하는 의미에서 '배리어컨셔스 연극'이라는 수식어를 선택했다.

관극의 접근성을 고려할 때, 여러 유형의 장애인 관객이 동시에 만족할 수 있는 공연을 만든다는 것이 꽤나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졌다. 특히 시각 장애인과 청각 장애인은 그 차이가 극명했다. 당사자로서 시각 장애인 관객에게 집중되는 공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이야기를 만드는 것부터 물리적 접근성을 넘어서는 정서적 접근성을 고려해야 했다. 그래서 음악극의 형식이어야 했다. 음악은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작용을 하지만, 시각 장애인의 경우 더 그렇다. 싱어송라이터를 섭외하여 안마사의 이야기를 다룬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다. 제목도 안마사들이 자기 일에 자부심을 더 가질 수 있도록 <국가공인안마사>라고 지었다.

작은 공연장이었고 객석 수도 적었지만, 전석 매진이었다. 여전히 시각 장애인 관객 수는 비시각 장애인 관객에 비해 적었지만, 어느 공연보다도 시각장애인 관객의 비중이 높았다. 관람한 모든 시각 장애인이 공감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 안마사들은 눈물 나는 후기를 전해오기도 했다. 그걸로 됐다. 작업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다소 비판적인 시선도 있었지만, 공감하고 감동하고 위로받은 관객이 있었기에 그걸로 되었다.

4. 모두의 연극 <도깨비 안마원>

2024년 6월 모두의 연극 <도깨비 안마원>을 올렸다. 지난해 <국가공인안마사>를 만들면서 시각 장애인 중에서도 청소년 시각 장애인, 그중에서도 미래의 안마사들을 위한 작품이 필요하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시각장애가 있어도 대학에 진학하는 요즘같은 분위기에서 고3 때부터 안마 현장으로 보내지는 어린 안마사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공감과 위로와 자긍심을 줄 수 있는 연극이든 영화든 무엇이든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생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안마'가 아닌, 안마사가 영웅이 되고 뭇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넘어 존경을 받는 서사가 필요했다. 슈퍼맨처럼 사람들이 추앙하고 우러러보는 안마사 캐릭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시각 장애인 안마사들이 시혜적 존재가 아닌,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되고,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이번엔 '모두의 연극'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더랬다. 진정한 모두의 연극이냐는 질문들이 있었지만, '접근성'이라는 말 자체가 아직은 이상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렇게 따지면 '접근성'이라는 말도, '배리어프리'라는 말도 아직은 아무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분명한 지향점이기에 그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몇몇 동료들의 우려를 무릅쓰고 '모두의 연극'이라는 수식어를 고집했다. 전 작업과 마찬가지로 시각 장애 안마사 당사자를 캐스팅했다. 음악극의 형식이고, 이번에도 작은 극장이었지만 전석 매진이었다. 모든 순간순간이 꿈처럼 기적처럼 지나갔다.

5. 이곳과 저곳 사이의 중간자, 저시력자

2024년 연말, 다음 연도를 계획하고 있는 요즘, '저시력자의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로 만들 생각에 빠져있다. 안마사의 이야기와 함께 거의 동시에 떠올랐던 소재다.

시각 장애인이라고 하면 안 보이는 사람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접근성 공연에서도 음성 해설과 터치 투어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눈으로 보는 시각 장애인은 간과되고 있다. 그래서 '시각 장애인의 눈으로 더 잘 볼 수 있는 연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음같아서는 모든 연극이 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무리일테니 그런 연극도 가끔은 있으면 좋겠다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하자고 하면서도 여전히 어느 면에서는 고려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나와 같은 저시력자가 거기에 해당한다고 생각되었다. 더 보이고, 덜 보이고, 장애 정도를 떠나서 다양한 몸의 하나로 인정되기를 바라며 구상하고 있다.

중간자로서 겪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비단 저시력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많은 중간자들이 있다.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이방인의 고독함은 단언컨대 가장 보편적인 정서 가운데 하나다. 저시력자의 입장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고독을 관통하는 새로운 이야기, 아니, 늘 있어왔지만 미처 몰랐던 또 하나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2025년을 기다린다.

6. 만나고 싶다

나는 두 갈래의 만남을 꿈꾼다. 하나는 시각 장애 청소년들을 찾아가는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하는 만남이다.

먼저 시각 장애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 그들이 환호할 이야기, 그들이 자긍심을 느낄 이야기를 가지고 찾아가고 싶다. 오히려 위화감이 생길지도 모르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친근하고 유쾌한 이야기로 찾아가고 싶다. 물리적으로도 찾아가고 싶고, 정서적으로도 더 가까이 가고 싶다. <국가공인안마사>와 <도깨비 안마원>은 처음부터 그런 바람을 가지고 시작한 작업이었다. 2025년에는 반드시 실현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최근 공연 환경이 급격히 변하면서 다소 묘연한 상황에 이르렀지만, 언제 어떻게든 우리는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다음으로 개인적이면서 보편적인 나의 이야기판을 벌여 발견하는 만남을 갖고자 한다. 소외되는 이가 없도록 하자면서도 여전히 소외되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함으로써 역설적인 공감과 위로가 발생하는 만남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소수자성, 다양성, 당사자성, 접근성, 포용성 그리고 핍진성이 충만한 이야기로 감히 조심스레 판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아직 구체적인 장소와 시기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경기도 어디 혹은 서울 어디에서 2025년의 어느 날을 초대할 것이다.

 
사진1. 배리어프리 에세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표지 / 장근영, 이성수 공동 저
사진1. 배리어프리 에세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표지 / 장근영, 이성수 공동 저



 
사진2. 모두의 연극 <도깨비 안마원>의 한 장면. 도깨비가 울퉁불퉁한 방망이로 남성 안마사의 등을 내려치고 있다.
사진2. 모두의 연극 <도깨비 안마원>의 한 장면. 도깨비가 울퉁불퉁한 방망이로 남성 안마사의 등을 내려치고 있다.



 
사진3. 배리어컨셔스 연극  <국가공인안마사>의 한 장면. 안마베드 앞에서 남성 안마사가 양팔을 활짝 벌리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사진3. 배리어컨셔스 연극 <국가공인안마사>의 한 장면. 안마베드 앞에서 남성 안마사가 양팔을 활짝 벌리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이성수 / 힘빼고컴퍼니 대표
힘빼고컴퍼니 대표, 시각 장애 연극인, 장애 인식 개선 교육 강사, 국가공인 안마사. 배리어프리 연극 <국가공인안마사>, 모두의 연극 <도깨비 안마원> 작·연출·출연. 배리어프리 에세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공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