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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문화예술교육 일반공모에 대해 생각하다
  • 임재춘
  • 2023.12.11

지지봄봄 39호

-겨울의 두께

지금 우리는 I

경기문화예술교육 일반공모에 대해 생각하다
강낭콩, 옥수수, 호박잎을 알게 되다

임재춘(지지봄봄 편집위원)

기획서와 알밤


경기문화예술교육 일반공모 서류심의를 하기 위해 전달받은 사업계획서(기획서)는 165개였다. 최대 2천만 원, 15개 남짓 선정할 수 있는 지원금의 규모에 비해 너무 많은 신청서(기획서)의 숫자가 극명히 대비되는 상황만으로도 여러 생각이 일었다. 5,000페이지는 족히 되었을 깨알 같은 글자들을 읽는 데 며칠이 걸렸다. 나에게 대체로 익숙한 작업이지만, 그 글자들 틈에서 문화예술교육을 이해하는 작성자의 관점, 서술한 내용을 해야만 하는 그들의 진지한 호기심, 대상이라고 하였지만, 프로그램을 통해 만나게 될 불확실한 타인을 향한 기대감 등을 포착하는 일은 꽤 고단했다. 서류의 양과 걸린 시간 때문만이 아니라, 기대한 이야기들이 잘 보이지 않아서다. 넘겨보다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 더 유심히 보지만, 당당하게 표현한 배급의 언어에서 예술가로서든 문화기획자로서든 또는 중첩된 시선에서든 서술자의 존재는 공허하다.

지루하고 열심히 보는 게 괴로워질 때쯤 질문하고 살펴 가는 흔적이 스민 기획서들을 만날 때의 반가움이란! 밤이 한창 영글어 떨어질 때면, 아침 일찍부터 비닐봉지 하나 들고 발로 땅을 헤치며 밤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여유 있는 아침 시간이 허락될 리 없는 나는 그들이 지나갔던 흔적으로 밤이 많이 떨어졌구나, 사람들이 많이 주워 갔구나, 가끔 보이던 청설모는 제 겨울밥은 잘 챙겨놨을까 등 생각하곤 한다. 근데 내 발밑으로 밤송이가 떨어지는 행운이 있을 때가 있다. 그래, 그랬다. 윤기 나는 알밤 서너 개의 뾰족한 끝이 야무지게 모인 모양새를 흘린 연두색의 가시 뭉치를 발견했을 때 조건반사처럼 흘러나오는 작은 탄성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의 확인, 그 이상의 의미

전반적으로 예산의 규모가 축소되고, 광역에서 기초지자체 행정 단위로 정책 범주의 방향이 바뀌는 등 문화예술교육 정책환경의 변화가 가시화되고 있다. 과정에서 지원의 방향, 지원사업의 구조 변화도 크든 작든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이번 경기문화예술교육 일반공모도 변화의 시간 중에 생긴 우연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이야기가 부족하거나 부재하다는 아쉬움은, 규모는 다르지만 늘 느꼈던 문제의식을 확인하는 정도로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65개라는 숫자는 지엽적이고 개별적인 사업 단위의 이슈를 넘어, 경기도 문화예술교육 전반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으로 확장하여 이전과는 다른 무게감으로 접근하기를 요청한다.

예를 들면, 문화예술교육 정책과 지원제도는 그동안 문화예술 현장 주체들에게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무엇을 지원하고 응원해야 할까, 지금까지 애쓴 것들과 다른 현실이 절대다수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우리는 서로에게 동료가 되어줄 수 있을까 등 근본적인 물음을 하지 않고는 이를 돌파할 다른 방도가 없다. 이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짚어보려면 올해 이 지원사업의 변화를 살펴봐야 하겠다. 현재 경기도 문화예술교육 정책의 환경이나 이를 주관하는 경기문화재단의 문제의식도 감지된다.
 

경기문화예술교육 일반공모

지원사업 트랙 중 하나인 ‘경기문화예술교육 일반공모’는 기존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신박한 실험과 도전’,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의 구분을 지워 어떤 형태든, 누구를 대상으로, 어디에서, 어떤 내용을 할지 등의 권한을 현장 주체들에게 넘겨주었다. 지원할 수 있는 예산의 규모가 크게 줄어든 것이 사업구조를 달리해야만 하는 현실적인 동기와 배경이 되었음을 짐작해 보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을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기대하는 사유의 판, 경험의 질이 다양하게 일어나는 순간을 목격하는 게 너무 더디고, 잦은 실망감과 난처함이 오히려 조금 더 과감한 선택으로 이끈 게 아닐까. 실제 공모안을 보면 단체의 철학과 관점에 따라 내용과 형식을 구상하고 채택하여 운영할 수 있음을 강조하며 기존 공모의 기준으로 적용한 시간, 횟수, 대상, 방법의 탈형식을 제안한다.

그러나 앞서 안타까움을 토로하였듯이 현장은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꿈다락 토요문화학교의 내용과 형식이 반복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심의는 일종의 구분과 선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심의 대상이 많으면 사실상 심의라는 행위나 과정이 무용해지기도 한다. 계란을 크기나 중량을 기준으로 특란과 왕란으로 구분하는 것과는 달리,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의 심의는 기준이 있어도 누군가의 판단을 통해 상대적으로 변별하기 때문에 어떤 기획이 좋다 나쁘다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뇌, 몸의 역량 범위를 넘어선다. 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파견지원사업 심의 같은 것들이 그런 경우이다. 그러나 이번 일반공모는 많은 사업계획서에 비해 선정이 어렵지 않았다는 점이 함께 생각해 볼 포인트다.

지원사업 영역 간의 단순한 통폐합으로만 여겼던 것일까? 변화의 의도를 감지하지 못해서였을까, 지원사업의 구조가 어떻게 변하든 자신의 고유함을 담아내고 드러내는 것은 애당초 조율의 대상이 아닌, 원래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아하다. 물론 자율이라고 해도 여전히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것들이 존재하지만 이전의 관습을 능숙하게 재현하는 모습에서 생각은 더 깊어진다. 그동안 많은 현장이 지원사업의 규칙으로 제한한 것들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못 한다는 말들을 해왔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었을까?

조금 비켜서 보면, 변화조차도 여전히 정책과 제도의 자기중심적인 인식과 속도, 방식에 기인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전문가의 위상에 기댄 거버넌스를 넘어서 현장 주체들이 고민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변화의 요체들이 있는가, 자신의 나아감을 위해 스스로 결심하는 변화의 행위들에 관해 묻고 논의했는가, 그것을 다음에 반영하여 책임 있는 결론에 도달했던 적이 있는가, 현장에 대한 물음 이상으로 정책과 행정 단위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서도 질문을 받아야 한다.
 

희미함의 수치, 채택되지 못한 이들과의 교류

‘165’라는 숫자를 문화예술교육을 하고자 하는 열망의 개수로만 치환해서는 안 될 듯하다. 문화예술교육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자기 경험과 인식에 비추어 추구되어야 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바람이 희미하다면, 이 숫자의 대부분이 그 희미함을 간증하는 것이라면, 향후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오히려 분명해진다. 자유로운 기획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많은 단체가 참여했다고 보지만, 각 사업계획서가 구현한 내용과 맥락에서 예술가로서의 고유함이나 자유분방함이 헐거워진 규칙의 의도만큼 발현되었는가, 그렇지 못했나, 무엇을 짚어내야 할까, 어떻게 의미를 교류할 수 있을까 등, 돌아봄이 필요하다. 현장이나 정책 단위 각자의 입장에서 찬찬히 생각하고 살피는 시간이 연초의 변화를 해석하며 이어갈 단초를 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공모에 선정된 주체들은 교류의 차원에서 늘 이런저런 자리들에 참여하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주체와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는 자리는 부족하다. 사실 앞선 문제들의 당사자와 대화할 수 없다면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물꼬를 트기 어렵다.
 

not general, this story

자유로움이 행정의 언어로 번역할 때 ‘일반’이 될 수 있겠다. 명확하게 제시되는 주제, 주제어가 없어서 참여하는 이가 정할 수 있다는 태도가 다소 관료적으로 느껴지는 표현이지만 일반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다. 일반이라는 표현을 넘어, 자율성이라는 의미가 활성화되려면 현장의 개별적 역량이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올해의 양상을 보면 일반에 내포된 포괄성에 사로잡히거나 안주하는 경우가 훨씬 많음을 확인하였다. 이게 뭘까 고민하며 구체적으로 지원 방향을 설정하고, 적절한 언어로 섬세하게 제시되도록 검토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지역 중심이라는 정책 기조에 따라 ‘일반’은 보편성, 용이함, 규모와 확장 등으로 대체되기 좋은 말이기도 하다.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이해나 기반 정도에 따라 기초 단위에서는 상당 기간 ‘일반’의 관점은 많이 쓰고 유용할 것으로 본다. 그와 달리 광역 단위, 광역 문화재단의 문화예술교육은 오히려 이런 관점들과 거리를 두어 광역의 역할을 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지역이든 현장이든 망라하려는 욕구를 절제하고, 광역의 역할은 무엇인지 논의해야 한다. 실험적 기획, 축적의 과정, 집요한 질문을 다루는 주체로서 광역의 존재감을 만들고 키우는 것, 일반적인 것이 아우를 수 없는 광역의 영역이자 몫이다.

또한 코로나 팬데믹으로 우리가 경험했던 ‘격리’를 다시 떠올려 본다. 다양성, 개인, 일상에 대한 사유와 경험, 이전부터 해왔던 것이지만 사회적으로 그 의미의 결핍이 인정되고 그래서 더더욱 그 의미의 환기가 이뤄졌고, 고통을 담보로 얻은 그 시절의 통찰이 어느새 아득하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건강한 삶을, 문화예술교육 실천가로 사는 삶을, 지역문화생태계라는 지속됨을 가능하게 하는가. 브뤼노 라투르의 말을 빌리면, ‘각각의 생성의 실천과 그럴 수 있는 계기가 때로는 극미하기 이를 데 없는 낱낱의 역량들이 약간 더 연장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만, 이러한 인식을 진심으로 신뢰한다면 ‘각각’, ‘개별적 주체’, ‘낱낱의’ 존재들이 자기다움을 추구할 수 있게 향후 지역 문화예술교육 정책을 고민하는 데 중요한 지침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맞설 것인가

퇴보, 퇴행이 유행인 시절이라고 한다. 문화예술 영역도 다르지 않다. 이런 시대에 약간 낙담한 기분으로, 때로는 격앙된 마음으로 쓸모없는 이야기들을 붙들고 써 내려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부추겼던 의미와 시도들은 성과주의에 묻히고 부정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더 자유롭고, 자기 본연의 이야기를 통해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예술가들에게 머물 수밖에 없는 눈길, 마음, 호기심, 매력은 어쩔 수가 없다. 문화예술교육은 그런 이들이 사라지지 않게 때로는 발견하고 가꾸고 돌보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삶들과 관계 맺기에 정책과 제도의 언어나 방식은 퉁명스럽고 다소 거만하다. 자기 세계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자신의 익숙하고 능숙한 언어로 치환하지 않는 이들을 중요하지 않거나 말이 안 된다고 여기기도 한다. 심지어 있는 것을 없다고도 하니 말이다. 다른 세계, 다른 존재에 대한 가능성조차 가장 보수적으로 반응하는 영역이 정책과 제도가 아닐까. 제도 바깥이라 불리는 현장, 자유로운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존재로서 예술가들, 일사불란함이나 시스템 체계에서는 현현할 수 없는 존재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위해 누구보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광역 문화재단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퇴행의 유행에 편승할 것인지, 버티고 맞설 수 있는 나름의 영리한 문화 전선을 만들 것인지 입장이 서야 한다. 정책환경의 어쩔 수 없는 변화를 내세워 현장을 압박할 것인지, 중단기 경기도 문화예술교육 계획을 수행하도록 광역 단위의 독자적인 예산의 수립이 상식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인지, 또한 광역 지자체와 광역 문화재단은 협력하여 (퇴행의) 유행을 주도하고 있는 중앙정부의 역할 회복을 주문하고 요구할 것인지 말이다.

문득 얼마 전 접한 이야기가 하나 생각난다. 옛날 멕시코인들은 강낭콩과 옥수수, 호박잎 세 가지를 함께 재배하였는데, 강낭콩은 땅을 비옥하게 하고, 옥수수는 강낭콩의 지지대 역할을 해주며, 호박잎은 땅을 덮어 습도를 유지하고 침식을 막았다고 한다. 옥수수에 없는 영양소를 강낭콩이 함유하고 있어 인간의 식량으로 훌륭한 조합이었다는 글이다. 여러 종자를 빽빽하게 한꺼번에 심는 밀파(Milpa) 농법을 통해 미국 등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어 굶주림이 일상인 농부들의 삶도 개선할 수 있었다. 신화에서부터 멕시코인들과 강낭콩의 관계를 보여주는 일화의 일부였다. 땅과 식물, 인간과 방식의 관계와 그사이의 유기적 활성화를 통해 얻은 성과의 구조가 간단하면서 명료하다. 지금까지 구구절절 말했지만 결국 추구해야 하는 문화생태계의 상이 이런 것이 아닐까? 당분간 나는 강낭콩이 되어야겠다.
 
임재춘 / 지지봄봄 편집위원
모든 게 처음인, 임재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