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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숲으로
  • 김송희
  • 2023.12.11

지지봄봄 39호

-겨울의 두께

기술너머

숲으로

나무 곁에 있기

김송희(예술가, 숲해설가)

‘숲으로 간다. 햇볕과 나무 그늘이 적당히 어우러지는 곳에서 몸을 바로 세운다. 내 곁의 나무들과 그 안에 부지런히 오가는 작은 것들을 느끼며 긴 숨을 들이마신다. 방금 아까시나무에서 뿜어낸 산소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천천히 내뱉는 날숨에 실린 이산화탄소가 팥배나무로 간다. 나무가 광합성하며 내뿜는 산소를, 빨갛게 익은 팥배를 따 먹던 물까치가 들이마신다. 그 숨을 칡덩굴이 받고, 청설모가 받고, 개여뀌가 받고, 부전나비가 받고, 겹황매화나무가 받고, 방울벌레가 받고, 주름조개풀이 받아 다시 나에게로 온다. 나와 숨을 나눈 노랑지빠귀가 시베리아로 날아가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것들과도 숨을 나눌 테다. 숲에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지구의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 또한 그러한 생명임을 받아들인다. 생명으로서 나를 살게 하는, 숲이 주는 사랑을 알아차린다.’

 
2022년 4월 숲에서
2022년 4월 숲에서

숲으로 가자


오래 살던 동네를 떠나며 지도 어플을 켜고 무작정 산이 있는 곳으로 와서, 처음 본 집으로 이사를 했다. 가파른 골목 끝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산의 능선에 닿는 동네. 그렇게 은평구 봉산 아래에서 산 지 8년. 숲 가까이 이사 왔을 뿐인데, 막연히 꿈꾸었던 일상이 시작되었다. 산새마을이라는 이름답게 딱새와 호랑지빠귀와 소쩍새 소리가 방 안에서도 들리는 동네에서 숲을 걷고 텃밭을 돌보고 반려견 호두와 산책을 했다. 오랫동안 해 온 일도 자연과 먹거리 관련한 일이라, 마음과 일과 생활이 일치하는 나날이었다.

몇 년 후, 나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마음을 크게 다쳤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호두와 더 자주, 산으로 갔다. 깜깜한 우주에 똑 떨어져 사라지는 기분이 들 때, 바로 곁에 호두가 있고 나무가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나를 둘러싼 숲의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게 들렸다. 비로소,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나는 조금씩 나아졌다. 씨앗은 어디에 떨어져도 어떠한 비교나 체념 없이 생명으로서 제 할 일을, 오직 제 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처럼 숲의 일부인 나 또한 생명으로서 그저 내 삶을 살아가면 된다는 것을 숲에서 깨달았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어느 오후 산을 내려오며, 어둠을 향했던 내가 밝은 쪽으로 마침내 돌아선 걸 느꼈다. 나무처럼, 생명은 결국 빛을 향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 경험이 놀라워 막연히 ‘숲’과 ‘치유’라는 단어를 함께 넣고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봤다. 이런 분야를 공부하는 과정이 있고, 관련한 직업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동안 놓아버린 일상을 가다듬고 계획을 세웠다. 흙 속에서 적절한 온도와 햇볕과 비를 기다리는 씨앗처럼, 나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마침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숲 공부를 시작하며 다시 세상에 나온 지 반년쯤 지났을 때, 호두가 죽었다. 그해 겨울은 몇 년간 일구었던 공동 텃밭도 반납하게 되었다. 돌봄으로써 돌봄받던 시간이 지나니, 마음이 숲으로 더 기울었다.
 
  • 2016년 1월 처음 산에 올라 본 풍경
    2016년 1월 처음 산에 올라 본 풍경
  • 2023년 3월 2일 나무가 모두 베어진 숲
    2023년 3월 2일 나무가 모두 베어진 숲
 

인간종이 사랑해서 베어진 숲

숲이 다시 보였다. 2015년 겨울, 이사 후 처음 산에 올라 만난 숲은 이미 기형적인 모습이었다. 벌거숭이산에는 작은 편백나무 묘목이 줄지어 심겨 있었다. 낯선 풍경이었으나 나무를 심었구나 했다. 때로는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목격하면서도, 모른다. 모르면 지나치게 된다. 나무를 모두 베고 편백나무 단일 수종으로 바꾸는 숲 가꾸기 공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숭실고등학교 뒤 사면의 울창한 숲은 모두 베어진 후 분홍색 꽃잔디만 심어졌다. 이미 편백나무로 바뀐 옆 사면의 오솔길 옆으로는 나무를 베고 무장애 숲길을 깔았다. 이게 숲에 꼭 필요한 일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올해 3월, 집에서 아주 가까운 숲의 나무가 모두 베어졌다. 베어진 지 얼마 안 된 나무둥치 수백 그루가 생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떤 나무들이었을지, 어떤 생명들이 깃들어 살다 쫓겨났을지, 이런 방법밖에 없는지 궁금해졌다.

숲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어 이번엔 지나치지 못했다. 민원을 넣었다. 은평구의 답변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산림청에 따르면 노령화된 숲은 생물다양성이 감소되고, 병충해나 산불에 약하며, 탄소 흡수량도 감소된다. 이에 산림 순환경영으로 나무를 베고 심고 수확하여 이용함으로써,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탄소 흡수율을 높일 수 있다. 편백나무는 산림치유 효과가 뛰어나 조림 권장 수종이자 미세먼지 저감 수종이다.’ 그러므로 문제가 없다는 요지였다. 다시 민원을 넣어 일단 올해는 벌목 계획이 더 없다는 것과 무장애 숲길 조성공사는 2025년까지 계속된다는 것, 숭실고 뒤 사면은 바위산이라 꽃잔디만 심었다는 답변을 들었다.
 
  • 울창한 숲이 베어지고 꽃잔디로
    울창한 숲이 베어지고 꽃잔디로
  • 봉산 능선을 잇는 대규모 무장애 숲길 공사 진행 중
    봉산 능선을 잇는 대규모 무장애 숲길 공사 진행 중


찾아보니 우리 동네만의 일이 아니었다. 몇 해 전부터 전국적으로 오래된 나무들을 모두 베고 어린나무를 심는 숲 사업이 한창인데 이유는 같았다. 오래된 큰 나무들을 베어 고부가가치인 산림바이오매스로 사용하고, 그 면적에 어린나무들을 더 많이 심어 탄소 흡수 효율을 높게 한다는 이른바 산림청의 기후위기 대응 ‘탄소 중립’ 계획이다. 흡사 탄소 흡수 기계 같은 나무 계산법. 이게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우리 인간종이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오래된 나무가 탄소를 더 많이 흡수한다는 연구 결과는 차치하더라도, 나무는 탄소 흡수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종에게 유용한 오래된 숲의 ‘기능’은 조금만 찾아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무로 인해 살아가는 다양한 생물들의 존재는 유용성의 우선순위에서 밀려 지워진다.

숲 공부를 시작한 후 나는 새삼, 사랑의 방식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용한다, 없앤다, 먹는다, 골라내고 버리고 가둔다. 사랑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행위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에 붙어 있었다. 누가 그 사랑의 주체인가가 행위의 과정과 결과를 만들었다. 인간종이 사랑하는 숲은 인간종만의 미감과 건강과 편의를 위해 베어졌다. 산림청이 사랑하는 숲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벌목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숲은 사라지고 있다.
 
10월 15일 나무 곁에 있기 모임 풍경
10월 15일 나무 곁에 있기 모임 풍경
 

내가 숲을 사랑하는 방법

나는 내가 숲을 사랑하는 방식을 찾고 싶었다. 틈틈이 숲 공사 현장에 가서 살펴보고 사진도 찍었다. 댕강 잘린 숲 위로 새들이 오갔다. 봄은 새들의 번식기다. 큰 나무둥치 위에 새모이를 조금씩 놓아주었다. 마치 위령제를 지내는 느낌이었다. 동네 주민으로서 개인적인 나의 활동과 별개로, 이 숲의 반생태적인 사업방식을 은평구 환경단체들이 주목하면서 곧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그 직후 베어진 숲에는 커다란 구멍이 줄을 맞추어 생겼고, 가느다란 편백나무 묘목이 심어졌다. 날이 풀리고, 풀이 돋기 시작했다. 숲은 새로이 생명을 품고 씨앗을 움트며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잘린 나무둥치에도 새 줄기와 잎이 돋았다. 그제야 이 나무들이 신갈나무, 아까시나무, 물오리나무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잎마저 다시 베어지기 전에 이 숲을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만나고 싶었다.

그냥 ‘나무 곁에 있자’는 말에 7명이 모였다. 우리는 ‘베어진 숲’으로 가서 각자 나무둥치의 잎을 보며 도감을 뒤져 이름을 찾아 달아주거나, 가만히 앉아 숲을 오가는 작은 것들을 바라보았다. 기존 숲이 남아있는 맞은편 깊은 숲을 탐험하고 오기도 하고, 새와 풀벌레 소리에 실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베어진 나무둥치에서 새 가지와 잎이 자라고 있다
베어진 나무둥치에서 새 가지와 잎이 자라고 있다


베어진 숲에도 그 환경에 맞추어 여러 생명들이 다시 살고 있었다. 아름다웠고, 이 또한 숲이었다. 그날 우리가 함께 걸은 가파른 흙길은 불편했고 무장애 숲길은 평등했다, 인간종에게는. 그러나 다른 방식이 가능하다. 예컨대 반드시 벌목을 해야 한다면 나무를 일괄적으로 모두 베는 방식이 아니라 솎아 베는 방식이 숲 생태계에 해가 덜하다. 편백나무 단일 수종이 아니라 다양한 수종을 심으면 나무들이 상호작용하며 숲이 건강하게 형성되고 각종 재해와 병충해에도 강해진다. 무엇보다 생물종마다 살아가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나무들의 숲에서 생물다양성도 지켜진다. 우리가 만드는 길은 숲을 쪼개고 쪼개어 결국 야생동물이 서식할 수 없게 만든다. 인간종의 필요에 의해 새 길을 낸다면 다른 길은 비인간종에게 돌려줄 수 있다. 강서습지공원에서는 데크길이 설치되고 몇 년 후, 일부 너구리들이 데크 아래에서 겨울을 난다고 한다. 무엇이든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은 변화가 아니라면, 자연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며 생명을 이어간다. 새로 심어진 편백나무 묘목 사이 베어진 나무둥치에서 새 가지가 나고, 씨앗부터 자라난 나무의 새잎들도 보였다.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놔두면 어떤 숲이 될까? 우리가 숲의 사랑을 받는 생명이자 숲의 일원임을 깨닫는다면 어렵지 않을 선택이다.

나는 그날 각자의 방식으로 나무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 해준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다. 우리가 숲을 사랑하는 방식은 각자 달라서 대화는 풍성했고 다른 상상으로 연결되었다. 각자 함께 살아가는 숲의 방식으로, 조각조각 우리가 나눈 말들이 흩어지지 않고 이어지면 우리의 숲이 되겠지. 여기엔 또 뭐가 깃들까.

 
숲
10월 15일 나무 곁에 있기
 
 

나무 곁에 있기


나무는 나무만이 아니고, 숲은 그저 나무가 모여있는 곳이 아니다. 다양한 식물과 동물과 미생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존재들, 그들이 서로 맺은 관계, 그 촘촘한 연결망을 포함해 나무 안팎의 생명들을 모두 모아 부르는 이름이 ‘숲’이다. 숲은 존재들이 서로 연결되어 각자 함께 살아감으로써 이루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인간종과 비인간종이 함께 살아감이 배려나 양보가 아니라 생명으로서 당연히 그러해야 함을, 나는 숲에서 보았다.

우리는 생명이라는 커다란 순환 안에서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도 결국은 돌아 돌아 마주하게 될 게다. 그때 내 곁에 있는 존재에 미안하거나 부끄럽지 않게, 이 순환 안에서 내 몫을 하는 것이 내가 자연스럽게 사는 방식이겠다. 그들이 지금 아무리 멀리 아무리 작게 아무리 조용히 있더라도. 그리고 어딘가에서 건너 건너 내게로 온 사랑을 기꺼이 받아 살아가겠다. 가장 커다란 숲인 지구 생태계에 속한 동물, 도시에 서식하는 인간종으로서, 의심하거나 자조하지 않고 내 곁의 존재들과 함께 빛을 향해 서고 싶다. 이런 사랑의 방식을, 숲을 이루는 수많은 존재들이 알려주었다.

‘그래서, 이제 뭘 해야 할까?
뭘 할 수 있겠어?
일단, 나무 곁에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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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송희(모로)/ 예술가, 숲해설가
문화예술과 커뮤니티, 농업과 자연 관련 일을 해왔습니다. 삶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모양을 갖추어 세상과 연결하는 일을 기획이자 작업이라 생각하며 하고 있습니다. 지구인으로서 나다운 그리고 자연스러운 삶을 지향합니다.
인스타그램 @bewithtree
사진 제공. 김송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