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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짜 땅에서 함께 놀며 벌이는 예술적인 하루 : 그레잇테이블
  • 김진리
  • 2023.12.11

지지봄봄 39호

-겨울의 두께

삶이 기획이 될 때

진짜 땅에서 함께 놀며 벌이는 예술적인 하루
: 그레잇테이블

김진리

그레잇테이블은 참여자가 하루를 어떻게 예술적으로 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보고, 듣고, 맛본다. 작물이 아니라 지속할 땅을 기르는 농부의 이야기를, 땅의 맛을 그대로 담은 요리사들의 음식을, 완성된 예술작품이 아니라 놀이하며 예술가와 함께 작품을 만드는 자신을. 그레잇테이블의 중심인 ‘땅’은 예술을 만드는 무대이자 재미있는 놀이터이고, 곧 우리의 몸이 될 생명이 자라는 밭이다.

그레잇테이블의 기획자인 오승희 대표를 만났다. 어제 캐왔다며 막 삶은 따끈한 햇땅콩을 대접하였다. 삶은 땅콩은 우리가 알던 붉은색이 아니었다. 매끈하고 촉촉한 흰 빛깔에 아삭한 식감이 색다른 맛. 예상하지 못한 작은 땅콩의 새로운 모양과 맛이 그레잇테이블이 내비치는 모습을 은유하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오승희 대표는 시종 따뜻하고 넉넉한 외할머니처럼 마주 앉은 사람들에게 계속 땅콩을 먹길 권했다. “벌레 먹은 게 있을 수도 있는데, 너무 놀라지 마시고 단백질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차분한 투로, 서툴게 땅콩 껍데기를 깨는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면서.

 
그레잇테이블 하루 풍경
그레잇테이블 하루 풍경


그레잇테이블(grEATable)이라는 이름에 많은 뜻이 담긴 것 같아서 재미있었어요. 로고도 귀엽고요. 이름을 이렇게 지은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로고는 유치원 다니는 둘째 아들이 크레파스로 써준 거예요. (웃음) 어려서부터 우리 모두 대통령이 될 것처럼 교육받으며 자라잖아요. 그런 식으로 집단적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성인이 된 뒤에 ‘내가 별거 아니구나.’ 느끼게 돼요. 오바마가 되지 않으면 후진 것처럼 보이는 삶. 그런데 실은 내가 별거 아닌 게 아니거든요. 세상의 기준에서 대단하다고 보는 어떤 순위에서 밀려났을 뿐이잖아요. 오바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을 먹으면서 삶이 더 기뻐졌어요.

음식물을 땅에 묻으면 썩어요. 그런데 씨앗을 묻으면 썩지 않고 자란단 말이에요. 작물이 매일 조금씩 조금씩 자라다가 언젠간 먹을 만한 크기가 돼요. 이게 더 새롭지 않나요? 코로나 기간 때 어땠나요? 우리는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작물들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아요. 매일매일 자라는 걸 보면, ‘나는 그냥 잘할 거야.’ 이런 느낌이 들어요. 이런 모습과 가치가 ‘얼터너티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삶이 더 대단하지 않아?’ 하는 마음으로 ‘그레잇’을 붙였어요. 이렇게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able’도 담겨 있고요. 특히 EAT에 방점을 찍은 건, 우리는 어쨌든 밭에 가서 ‘먹어야’ 알게 된다는 의미예요. 예술을 감상하고 문화를 소비하는 것도 ‘EAT’라고 하죠. ‘소화’는 흡수되어서 내 몸이 된다는 뜻이잖아요. 먹는 것이나 예술도 마찬가지로 내 몸에 흡수되어 체화된다고 생각해요.

그레잇 테이블, 쉽고 팬시하잖아요. 책을 낼 때도 만만해 보이는 표지로 디자인하려고 노력했어요. 멋있는 거 하고 싶죠. 근데 멋있는 것보다 만만해서 집어들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 보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레잇테이블 : 730일간의 밭놀이] 책 표지
[그레잇테이블 : 730일간의 밭놀이] 책 표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구상할 때 주요하게 여기는 지점, 그레잇테이블만의 철학은 무엇인가요?

철학은 계속 변하는 중이에요. 시작하면서도 잘 모르는 영역이라고는 생각했지만, 3년 정도 밭에서 보고 듣고 하다 보니 제가 정말로 뭘 모르고 여기에 왔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봄·여름·가을·겨울을 지내면서 농부님들이 농작물을 키우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잘 자랄 수 있는 땅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시는 걸 알게 됐어요. 농부는 땅을 기르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는데, 예술가도 그렇죠. 공연이나 작품 같은 어떤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자양분이 된 생각과 그것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즐기는 게 예술가잖아요. 저희 팜투테이블을 만드는 요리사도 마찬가지예요. 재료에 관한 가치관과 요리를 대하는 태도가 그간의 과정에서 나오니까요.

처음 시작한 두 해 동안 제가 너무 농작물에만 포커싱을 했더라고요. 그때까지는 멋있는 말을 썼죠. ‘밭에서 만나는 재미와 놀라움’ 뭐 이런…. (웃음) 모든 광고주가 좋아할 만한 단어를 다 써서 설명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왜 저희가 ‘땅’이 아니라 ‘밭’이라는 말을 쓰는지 아세요? 진짜, 진짜 땅은 여기에만 있으니까. 그래서 도시 사람들을 밭에 오게 하는 게 우리의 미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올해가 되어서야 하게 됐어요. 그래서 제가 썼던 모든 카피를 다 버리고 지금은 ‘City to farm’을 키워드로 쓰고 있어요.

또 제가 좋아하는 사진이 있어요. 저는 밭 자체가 하나의 무대라고 생각하거든요. 창작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그 무대에 우리가 모두 올라와서 그날 하루를 밭에서 잘 지내면 하나의 퍼포먼스가 되는 거라 생각해요. 무대의 개념을 화이트큐브나 프로시니엄으로 보는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거죠. 우리는 무대에 다 같이 올라서 그 공간이 왜 거기 있어야 하고, 왜 우리가 거기에 가야 하며, 우리가 왜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해요.
 
그레잇테이블 하루 풍경
그레잇테이블 하루 풍경


보통은 자신이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판에서 일하려고 하지요. 왜 모르는 영역에서 이 기획을 시작하게 된 건지 궁금해졌어요.

아기를 가지게 되면서죠. 제가 뭘 먹는지가 아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잖아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농부님께서 ‘우리 몸은 음식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몸으로 좋은 걸 먹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 거죠. 처음부터 생태를 주제로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환경과도 연결되어 있어요. 외국에서 발행된 어떤 책에서 사진을 한 장 봤어요. 농장에 줄지어 깔린 흰 테이블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어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기획이 시작되었죠. 저는 이걸 파티처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예술 프로젝트로 해보고 싶었어요. 당연히 그럼 농장에 가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거 같아요.

막상 들어와 보니 책임감이 무겁더라고요. 이 신을 들여다보니 농업도 있고, 농업 안에서 문화적으로 활동하는 분도 있고, 생태 미식이나 농부 시장 같은 다양한 프로젝트들도 보이고요. 전에는 생각하지 못한 큰 네트워크에 제가 들어왔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이전에도 환경을 생각하며 소모적이지 않은 기획을 하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더 책임감이 느껴지더라고요. 처음에는 농업이니 작물이니 ‘와 예쁘다’라는 식으로 시작했는데, 저분들에게 나의 영향력이 가는 것이니까 더 진중하게 임해야겠다고 지금은 생각해요.

그렇게 기획한 프로젝트를 실제로 진행할 땐 어떠셨나요?

농장에 처음 갔을 때 완전히 충격받았어요. 농장이 외국책에서 본 그 사진처럼 생기지 않았더라고요. 테이블을 놓을 수 없는 거예요. (웃음) 자연의 방식으로 농사짓는 농부님들 땅에는 땅마다 작물이 자라고 있어서 그 위에 테이블을 깔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그레잇테이블이지만, 실제로는 테이블 없이 하고 있죠. 우리의 테이블은 실재하는 테이블이 아니라 밭 자체가 무대가 되는 테이블이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아직도 테이블의 형태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사실, 셰프님들은 당황스러우시겠죠. 테이블도 없고 시설도 제대로 갖춰 놓은 곳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다회용기를 사용해달라는 요청 같은 걸 잔뜩 하고요. 이번엔 심지어 식기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어요. (웃음) 찐빵이나 도넛 같은 형태로 한 손에 들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고요. 밭에서는 손이 모자라거든요. 한 손엔 음식, 한 손엔 텀블러 이렇게 먹을 수 있게 해줘야지, 뭐가 더 들어가면 먹는 것도 번거롭고 당연히 쓰레기도 발생하고요. 여기서 불로 태워서 다 없어질 수 있는 것까지만 하자는 게 목표거든요. 좀 억지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레잇테이블에서는 음식이 주인공이 아니에요. 음식은 수단이죠. 요리사의 표현 방식인 거고요. 요리사의 작품을 참가자가 흡수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음식은 우리 몸으로 체화할 수 있는 땅 그 자체라고 생각해요.

셰프님들이나 참가자들은 그레잇테이블의 가치를 잘 받아들였나요?

그럼요.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죠. 저희는 테이블도 의자도 쓰레기통조차 없어요. 본인이 만든 쓰레기는 본인이 가져가는 게 원칙이에요. 항상 프로그램 마지막에 불놀이를 하거든요. 불놀이에서 다 태우고, 땅의 거름으로 만들고 땅을 떠나요. 태워질 모든 것은 땅에 바로 들어가도 되는 재료여야 해요. 땅이 가장 소중하고, 땅이 우리 제일의 가치니까.

참가자들이 보기에는 좀 괴팍할 수도 있죠. 참여하는 방식도 그래요. 참가자에게는 진행내용을 사전에 노션을 통해 공지해요. 저희는 거기서 시간이 되면 종만 쳐요. 오픈 채팅방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그럼 참가자들이 휴대폰만 계속 보더라고요. MC도, 자기소개하는 시간도, 상세한 안내도 없어요. 누군가 스피커가 되는 순간 참가자들이 수동적으로 변하기 쉽거든요. 참가자들도 자발적인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쓰는 방법은, 무뚝뚝하게 대한다는 거죠. 섣불리 창작자가 주도하지 않는 거. 친절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다만, 다 가르쳐 주지 않는 거죠. 처음에는 당황하고 불안해합니다. 30분 정도 되면 옆에 온 참가자랑 이야기하기 시작해요. 여기까지 오시는 참가자들은 굉장히 적극적인 분들이에요. 문화예술도 어느 정도 즐겨보시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고 새로운 걸 찾으시는 분들. 여행의 여유가 있는 분들. 그리고 이런 가치를 이해하는 생태 미식에 관심이 있는 분들.
 
그레잇테이블 하루 풍경
그레잇테이블 하루 풍경


그레잇테이블을 설명하는 말 중에서 ‘장소 특정성에 주목하여 벌이는 하루의 해프닝, 비정형의 퍼포먼스’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데요. 프로그램 장소와 내용도 늘 달라지는 것 같더라고요. 참여자들의 자발성과 프로그램의 즉흥성이 두드러지는 기획이 인상 깊어요.

컨설턴트에게 콘텐츠를 정형화하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산성이 떨어지니까요. 그렇지만 생산성이야 어떻든 저는 만드는 이 과정이 좋아요. 제가 늘 새로운 걸 찾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농장마다 작물도 사람도 이야기도 다 다르니까 관객 입장에서도 좋을 거고요. 한곳에서만 너무 끈끈해지면 다른 생각들이 생길 수도 있고요.

참여하는 예술가들에게도 저는 결과물을 내지 않아도 좋다고 해요. 사전에 밑 작업 같은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죠. 관객도 동원할 필요 없어요. 하겠다고 하면 사람들이 알아서 모여요. 음악가가 어떤 곡을 연주할지 저도 모르지만, 본인도 모를 거예요. 이를테면 연주하면서 무용이 맞물려 들어올 거라는 정도의 이야기만 하는데, 그 두 아티스트를 서로 인사시키지도 않아요. 이런 장난들을 해보는 거죠. 이런 즉흥성에 다들 동의하시고 재미있어하시죠.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는 것도 어떤 실험일 수 있으니까요.

한 작가님이 저한테 하시는 이야기가, 이제 알겠대요. 여기서는 잘 노는 게 멋진 거구나. 잘 놀고 그렇게 노는 표현양식이 본인이 했던 작업이 되는 거라는 걸. 이런 걸 참가자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하면 김빠지잖아요. 그걸 아는 순간 정형화되어 버리거든요. 그레잇테이블은 그냥 믿고 와도 되는 곳으로 만드는 게 제 목표예요. 밭이 다라고, 그냥 그렇게만 말하고 싶어요.
 
그레잇테이블 하루 풍경
그레잇테이블 하루 풍경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에피소드가 있나요?

부용리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자기 땅이 없는 농부님들이 계세요. 땅을 가진 할머니들이 빌려주시면 거기서 농사를 지으시는데, 땅들이 한곳에 몰려 있지 않고 다 떨어져 있거든요. 밭마다 번호를 붙이고, 이동할 때 사물놀이를 하면서 다녀요. 그런데 밭 주인이신 양승임 할머니가 우리가 온다고, 당신 땅을 빌린 데레사 농부님 친구들이 온다고 사물놀이 리듬에 맞춰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시면서 저희 쪽으로 오시는 거예요. 그 춤사위를 보는데…. 제가 정말 눈물이 없는 사람인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이거야말로 진짜 환대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는 마을 사람도 아니고 여기서 이상한 짓만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데레사 농부의 친구들이 이렇게 와서 오늘 우리 밭에 찾아온다니, 그게 너무 기쁘셨던 것 같아요. 할머니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믹스커피거든요. 그 믹스커피를 대접받았어요. 정말 최고의 호의거든요. 그날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기획자는 대체로 환대하는 역할이어서 환대받을 일이 잘 없는데, 그 덩실거림에서 환대받음을 느꼈어요.

마지막으로 아카이빙에 관한 질문을 던지자, 참여자가 잘 놀았던 하루의 기록이 예술가의 시선 안에서 다큐멘터리와 같은 작품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승희 대표는 가시적인 결과물보다 더 소중한 기록이 있다고 전했다. 음식으로 몸에 새긴 오감의 기억, 맨발로 땅을 밟으며 살에 흙물을 들여보았던 경험, 시장에서 만난 작물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는 새로운 해석들. 이처럼 일상에 돌아갔을 때, 삶으로 적용되고 이어지는 게 좋은 문화기획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면서.

김진리
지역과 커뮤니티, 관계가 지닌 가치에 관한 글을 쓰고
모두가 안전하게 자신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듭니다.
이메일 jinri.zszs@gmail.com

사진 제공. 그레잇테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