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호공모라는 레토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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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호 공모라는 레토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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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지원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한때, 예술에 대한 인식이나 문화예술정책이 소수의 탁월함에 머물러 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민간 문화 주체의 역할이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는 대규모 관주도 문화 행사 대행’으로 이해한 시기와 겹친다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경연 대회 성격의 장르별 각종 예술제 같은 행사를 떠올릴 수 있을 듯합니다. 당시 이러한 흐름은 관변적 성격의 민간 문화 주체들이 등장하고 자신들의 영역을 만든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불안정한 정치와 이념의 대립으로 유발된 사회적 긴장감이 높았던 가운데, 이렇다 할 문화예술 정책의 방향성은 없는 모호함의 틈바구니에서 감시와 통제, 검열이라는 규제가 예술 행정의 언어로 옷을 갈아입고 제도화로 이어진 것도 이 시기, 1960~1990년 사이 문화정책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문화적인 삶의 고양에 관한 정책적 관심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면서 문화 민주주의와 같은 단어들이 문화정책에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이후라고 합니다. 저는 그런 흐름의 드라마틱한 분기점, 즉 다수 사람이 변화된 관점으로서 문화예술정책의 태도를 감지하고 체감하게 된 문화적 사건 중 하나로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의 제정과 시행(2005)을 꼽습니다. 그 시기 청년이었던 저를 떠올려 봅니다. 예술의 주체로 여겨지는 존재는 저 산 너머, 도달할 수 없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시민의 자격만으로도 충분히 예술을 향유하고 창조할 기회가 공유된다는 것에 어리둥절했습니다. 내 삶에 관한 이야기가 곧 예술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에 들떴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한 개인의 생활 세계가 다른 차원으로 열리는 문을 마주한 것과 같은, 어색하고 낯선 충만감이었습니다. 당사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전하는 놀라움의 확대가 변화된 문화예술지원의 방향성이자 의미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16여 년의 시간이 지나는 사이에, 사회적 가치와 사람의 삶을 주제로 한 질문에 무게중심을 둔 문화예술교육 정책의 존재감은 문화예술 관련 정책이 나아갈 방향의 기본이자 상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번 글을 통해 특히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그다음에 관한 것입니다. 정책이 제도적 양식과 문법으로 구체화하고 실행되면서 바로 위에서 표현한 상식은 지나치게 포괄적인 의미로 확장되어 하나 마나 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의미의 기표만 남고, 문화예술교육 사업과 과정의 내면은 가시적 성과의 추구, 행정의 편의와 기준으로 문화예술교육 실행의 타당함을 재단하는 등 2000년대 이전 문화정책의 인식에서 기대한 만큼 벗어나거나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오래전 지지봄봄의 지면을 빌어 문화예술교육정책과 제도에 대한 불만과 문제의식을 쏟아낸 적이 있습니다.(2016. 12. 지지봄봄 20호, ‘나름의 입장과 각각의 언어’) 문화예술교육을 잘하고 싶은 의지와 실천이 정책과 제도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의존 때문에 되레 현장 실천가들의 자율성을 저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 마음을 함께 전했던 글이었습니다. 문화예술교육 정책과 제도, 사람들에 관한 미학적 고민이나 판단은 물론이고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한 의견이라는 측면에서, 그때의 생각은 여전히 쓸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모(지원사업)는 이러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그것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난감한 공모(지원, 사업)
아마도 이 주제에 대해서만큼은 저마다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누구는 선정되고 누구는 안 되었다, 선정기준이 뭐냐, 심사를 받고 왔는데 짧은 시간에 말을 잘하고 왔는지 모르겠다, 위축된 기분이 들었다, 불쾌했다, 근데 선정되려면 계획서를 어떻게 써야 하냐 등. 공모 지원사업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중간지원기관의 실무자들과 심사위원 등 그 과정의 조력자들 역시, 뽑을 수 있는 기획서가 많지 않다, 현장이 낮은 수준에서 정체되어 있다,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가 근대적인 인식에 머물러 있다, 문화예술교육의 맥락에 대해 어디서부터 말을 건네야 할지 난감하다 등의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공모는 문화예술정책에서 지원이라는 제도적 경로가 설정되면서 따라붙은, 행정 절차와 방식 중 하나라는 점입니다. 공모가 공정하고 타당하다고 믿게 만드는 지배적인 요소는 행정적 절차와 방식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공모라는 것은 문화예술 정책이나 제도의 담론과 무관하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왜 나는, 다수의 사람들은 문화예술교육을 말할 때 공모, 공모지원사업을 문제의 대상으로 동일시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러한 인식들이 지역의 문화생태계, 문화예술교육 생태계를 만들어감에 있어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요? 공모를 통한 지원을 으레 지원에 따라오는 절차상의 공정함에 국한하여 공모지원사업에 내포된 모순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해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려 합니다.
공모라는 수사가 부추겼던
너무 경쟁적인 방식입니다. 예술가들, 문화예술교육 실천가들의 활동 저변이 넓지도 깊지도 않은 불안정한 환경에서 경쟁은 더욱 극대화되기 마련입니다. 허기진 이들이 작은 파이를 놓고 생존 다툼을 해야 하는 상황은 개인의 불안한 마음을 부추깁니다. 이러한 불안을 볼모로 한 경쟁적 자기 증명을 위한 사업에는 예술가 자신은 물론,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만나고자 하는 타인에 대한 궁금함과 호기심이 없습니다. 대신 행정 등 바깥의 시선을 의식한 겉치레 같은 언어와 방식, 트렌드를 소비하는 재료들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문화예술교육이 시장과 자본의 언어와 속도를 따라가면서 쉽고, 친절한 서비스 상품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문화예술교육이 아닙니다.
공모지원사업이 집행되는 속성 중 하나가 총지원금에 맞춰 사업신청서를 선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내용의 신청서를 예산이 부족해서 선정하지 못하기보다는, 자질이 부족한 신청서를 억지로 선정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은 상황을 고려하면, 문화예술교육이 아닌 것을 선정하고 그것이 문화예술교육으로 회자하도록 한 혐의가 심의 과정에서 만들어집니다. 제도는 결과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전문가를 앞세워 컨설팅과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이것은 다시 전문가의 의존도를 높여 개인이든 재단이든 스스로 내부적으로 역량을 쌓기 어려운 메커니즘으로 작동합니다. 이것 역시 모집과 선정이 말끔하게 이뤄져야 하는, 공모가 가진 함정 중 하나입니다.
공모사업이 가진 문제의식은 문화예술 영역만의 것이 아닙니다. 중앙정부 부처가 시행하는 전국 지자체 대상의 공모사업에서도 실은 거의 동일한 문제들이 드러납니다.
“지자체가 스스로 재원을 만들기 위해 애쓰기보다 국고보조금을 통해 부족한 예산을 확보하려 하고 선정을 통해 정치적 홍보 효과를 노리는 등 공모사업에 집중하게 된다. 게다가 지자체 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한편 중앙부처는 지자체의 행정 역량에 대한 우려로, 더 중요하게는 자신의 정책 의도를 관철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공모사업을 통한 국고보조금 지원 방식을 놓지 못한다.”([넥스트 브릿지]지방자치와 재정 분권, ‘돈줄 쥔 중앙부처 공무원…지역 모르는 지역사업’, 기사 중 일부, 박경원, 2022.4.11, 오마이뉴스)
지역분권, 현장 중심의 정책 실행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공모지원사업이라는 프리즘은 문화예술, 행정 등 다원화된 주체들 간에 관계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수행하게 합니다. 행정과 문화예술교육 현장 사이의 영역만이 아니라, 광역과 기초단위 자치단체 및 문화재단 간의 협력과 소통, 또는 중앙부처와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 간에 의미 있는 변화의 제도적 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꼭 짚어가야 할 단계로서, 공모와 지원을 제도적 행위라는 차원에서 함께 곱씹기를 제안합니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집요하게 들여다볼 문제는, 예술적 실천에 관한 지원제도와 방식으로서의 타당성을 다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제도의 기획, 공모 말고
공개적인 절차를 통해야 한다는 공모의 미덕이 독재정권의 시대, 감춤의 시대에 갖는 정치적, 문화적 함의가 작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앞서 말하였던 바처럼, 공모는 알려 모으는 하나의 기술적 장치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정책과 제도가 문화예술교육 현장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미학적 영향을 끼칩니다. 특히 예술가 등 문화예술교육 실천가들의 자율성을 근간으로 한 지역문화생태계의 건강한 형성과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는가와 밀접합니다. 규제적 태도들이 문화정책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술, 예술가의 자율성에 관한 검열과 감시, 규제와 같은 장치가 일제와 군부 독재 시기에 태동한 문화정책과 제도의 태생적 한계이자 트라우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요. 허나, 2022년 지금, 근원적인 생태적 위기 속에서 이전에 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유와 실천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협력자이자 친구로서 정책과 제도의 방향 전환이 절실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시도들이 필요할까요? 행정의 엄밀함과 엄격함을 밀어 놓고, 당사자들이 모여 궁리하고 시도해 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자리가 필요할 텐데요. 저는 먼저 심의 과정과 절차를 문화윤리를 토대로 한 상호신뢰의 문화적 장치로 전환하는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선별과 선정을 통해 우열을 가리기보다(문화예술교육에서 우열을 가린다는 것이 적절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각 주체(광역자치단체, 기초자치단체, 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문화예술교육 실천가)가 고민하여, 하고자 하는 바를 일종의 사회(적) 계약을 통해 지원하거나 협업하는 것입니다.
이런 저의 주장이나 생각이 현장 실천가들로부터 정서적 동의를 얻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과 미학적 정당성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년간 현장과 전문가들이 언급했던 문제의 제기, 대안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겠다는 결의마저 느껴지는 행정과 제도의 세계 앞에서, 수없이 좌절했던 지난 경험은 ‘아마 안 될 거야.’라는 짙은 회의감이 일기도 합니다. 올해는 국가 단위 문화예술교육 종합계획을 새롭게 갱신하는 해입니다. 더불어 경기도도 2018~2022의 경기문화예술교육 기본계획에 이어 향후 5년의 비전을 만들어가는 발전계획의 수립을 위한 연구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 논의의 언저리에 머물다 보니, 어느새 약간의 정의감과 변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서성대는 저 자신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쉽게 제 말을 듣고, 믿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저는 다소 독립적인 기질의 여자이며, 미처 중년이 되지 못한, 대학교수도 박사님도 아니니 말입니다. 서성이다 뭔가 내 삶에 도움이 안 되겠다 싶으면 얼른 발을 빼야겠지만, 무엇 때문인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저처럼 과거의 좌절을 잊고 또 애를 쓰고 있으니 거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